큰애는 어려서부터 수도없이 그림이나 글을 써서 나에게 주곤 했는데, 좀 커서부터는 나에게 부탁할일이 생겼을때 혹은 내가 어떤 일로 아이들에게 화가 났을때 편지를 준다.
“Mom, I’m so sorry!” 와 같은.
헌데, 언제부터인가 큰애가 써오는 편지에는 이와 같은 말들이 있다.
“I know you are going to be mad”
“I know you say NO”
“ I know you may yell -.-” but can you please …
그 다음에는 대개 평소에 말로 해서는 나에게 안먹혔던 일들을 부탁한다.
예컨데, 자기전에 아이패드를 잠깐 쓸수 없겠느냐, 오늘 30분 늦게 자러가면 안되겠느냐, 동생하고 둘이서 베이킹을 하면 안되겠느냐, 내일 성당에 안가고 놀이터에 가면 안되겠느냐, 이따가 슬라임가지고 놀면 안되겠느냐 (난 슬라임이 세상에서 제일 싫고, 반짝이가 들어간 슬라임은 우주에서 제일 싫다) 뭐 그런 부탁들이다.
그리고 나서 빼먹지 않고
“I promise I’m not going to bother you anymore” 을 덧붙인다.
이런 편지를 받고 나면 기분이 묘하다.
우선, 어디서 이런 감언이설로 나를 꼬시는거야! 란 생각이 들면서도 또박또박 써내려간 한글자 한글자가 귀여워 피식 웃음이 난다. 뭐 절대로 안될일이 아니고서야 이렇게 정성을 들인 리퀘스트는 대체로 통과시키는데, 그걸 누구보다도 더 잘 아는 아이들의 수작이다.
그리고 나서 찝찝하게 드는 생각은, 내가 애들한테 너무 엄격하게 구나? 란 생각이다. 내가 애들한테 안된다고 하는 것이 너무 많나? 내가 애들한게 화를 자주 내나? 아니, 내가 소리를 뭐 얼마나 질렀다고 얘네는 참. 딸이 써온 극도의 겸손 혹은 방어적 표현이 글쓴이의 의도와 상관없이 나에게 훅 들어와 찔리게 만드는 것이다.
게다가 이거 들어주면 이제 엄마 귀찮게 안하겠다니. 나를 평소에 귀찮게 하는걸 잘도 알고 있으니 제법 기특한데?라는 생각뒤로, 내가 애들한테 혹시 “엄마좀 귀찮게 하지마” 라고 소리친적이 있었던가 곰곰히 생각해보게 한다. 이래저래 읽으면 읽을수록 뒷통수가 머쓱해지는 편지가 아닐수 없다. 귀여움과 천진함을 내세운 편지가 어째 읽는 사람을 반성하게 만든다.
아이가 써오는 편지 아랫부분에는 늘, 부탁을 들어줄건지 아닌지 대답하는 란까지 만들어져 있다. 이쯤되면 편지가 아니라 계약서 분위기가 난다. Yes/ No 를 동그라미 치거나, 싸인을 하는 란을 야무지게도 잘 만들어왔다.
Yes/ No 한쪽에 그냥 동그라미를 치려다가, 일단 두꺼운 색연필로 YES에 동그라미를 진하게 하고, 그 앞에 “absolutely and always” 라고 크게 썼다. 그리고 아래에다가 “You can bother me anytime. Your job is to bother me and my job is to be bothered by you. I’m happy to be bothered because you are my daughter!” 라고 써서 아이방 책상위에 무심하게 올려두었다.
편지를 보자마자 내가 어디에 동그라미를 쳤는지 부터 힐끗 눈으로 확인하는 기대반 불안한 반인 눈빛이 나에게 금새 읽힌다. 예상외의 답장에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킥킥 거리면서 웃는다. 얼굴이 그새 환해진다.
'엄마가 안돼! 라고 하는게 많은거 같애?' '엄마는 너한테 안된다고 하는것보다 그래 해!라고 말하는 적이 많은것 같은데'. '근데 왜 항상 엄마가 안된다고 하겠지만, 엄마가 노 하겠지만, 엄마가 심지어 소리치겠지만 이라고 쓰는거니?' 라고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들이 많았지만, 그냥 마음속으로 삼켰다.
아이들 나이가 어릴땐 규칙을 정하거나 안된다고 하지 않으면 하루하루가 제대로 돌아가지 못했다. 그래서 때때로 안된다는게 많은 엄마였다는걸 부끄럽지만 인정한다. 그게 어느새 아이에게 방어적인 태도를 갖게 만들었다면 그에 대한 책임도 나에게 상당부분 있다는 것 또한 인정한다. 아이는 이제 혼자서 해낼수 있는게 많고, 스스로 할일에 대한 책임감이 생겼기 때문에 내 손을 떠나서 알아서 해결하는 일이 많아졌다. 그래도 “사건”을 저지르기 전에 늘 와서 나와 얘기해보고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고맙다는 생각을 한다.
아이방에 다시 들어가서 물었다. “이제 기분 좋아?” 그랬더니,
소리를 꽥 지르며 “응!!!” 한다.
아이구 참 좋겠다 그래.
“엄마는 이제 니가 혼자 결정할수 있는게 많다고 생각해. 니가 생각하기에 괜찮을것 같다 나쁘지 않을것 같다고 생각하면 엄마에게 물어보지 않고 결정해도 돼. 물론, 잘 모르겠으면 엄마랑 같이 생각해보는걸 연습하면 되고. 앞으로는 혼자 결정해야 할 일이 더 많을 거야. 엄마는 이제 니가 준비가 되었다고 생각해. 잘못된 결정보다는 좋은 결정을 더 많이 내릴수 있을거야. 그리고 가끔 잘못된 결정 내려서 엄마 귀찮게 해도 …. 엄마가 쓴거 봤지? 괜찮아! 넌 딸이니까 엄마 귀찮게해도 되는거야!”
“알았어, 앞으로 계속 귀찮게 할께! I love you mom!!”
장난기를 실어 외치는 아이의 큰 목소리가 오늘은 마음이 놓였다.
내 딸도 딸이 처음이라 나도 엄마가 처음이라 서로 쉽지 않았지만, "노우!" 하는 엄마 틈을 이렇게 파고 들어 나를 곰곰히 반성하게 하는 딸 덕분에 또 많은 것을 느끼고 배우니 감사한 하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