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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와이제이 Dec 11. 2020

서평과 에세이 그 사이

괴로움은 엉뚱한 욕심에서 비롯되었다. 


다른 사람들이 읽고 좋다는 책은 어떻게 해서든 읽고 싶었고, 나도 좋고 싶었다. 그 책 속에서 나역시 그들이 느꼈던 감동과 느낌을 고스란히 갖고 싶었다. 그 사람들이 세상이 다 아는 유명한 서평가가 아니라도 상관없었다. 문학적 소양과 통찰력이 탄탄해서 평소에 눈여겨보며 부러워했던 "사람들"이라면 더더욱 그랬다. 


그래서 무턱대고 주문한 책이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이라는 얇은 문고판이었다. 유난히도 이 오래된 책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들려오던 즈음이어서 길고 짧은 여러개의 서평을 읽었다. 세상에 '버지니아 울프'이고 '자기만의 방'인데, 당연히 수도 없는 사람들이 읽고 수도 없는 독후감을 써내려갔을터이다. 비슷하기도 하고 또 다르기도 한 서평들을 읽으면서 아직까지 그 책을 읽어본적이 없었음에 얼굴이 조금 붉어지기까지 했다. 주제는 명료해보이지만 책속에서 건져올린 생각과 인상들은 저마다 달랐다. 그렇다 하더라도, 누군가에게 어떤 사람들에게 찬사를 받는 책임은 분명해 보였다. 첫장을 펼치기도 전에 나는 이 책에서 무엇을 건져올릴수 있을까 두근거렸으니, 그 시작부터 불순했음을 인정한다.  


그러나 책은 역자의 말을 지나서부터 곧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총 6장으로 구성되어 있었지만 1장 군데군데에 도돌이표가 있는것 처럼, 책장은 얼만큼 앞서 가다가 이내 돌아오기를 계속했다. 읽고 있기는 하지만 앞서 읽은 "다른 사람들"처럼 단숨에 빨려들듯이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나갈만한 힘이 도무지 나에게 뻗치지 않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책장은 펼쳐졌다 덮이기를 계속했다. 함께 시작했던 다른 많은 책은 읽히고 또 지나갔는데, 이 책은 그럴수가 없었다. 한 단어 한 문장을 정성들여 읽어내고, 글의 앞뒤를 부지런히 오고가며 생각의 고리들을 연결해갔지만, 그 속에서 나만 우왕 좌왕 길을 잃는 기분이었다. 이 책에서 아무것도 건져올리지 못한다면, 나는 꽤 부끄러워질것 같았다. "다른 사람들"이 좋다는 책인데 나만 그렇지 못하다면, 웬지 나만 멀리서 가까이 오지도 못한채 허우적거리다 힘이 다 빠질것 같았다. 이제와 생각해보니, 너무 큰 기대속에 시작했던 탓인것 같다. 


솔직히 말하자면, 버지니아 울프라는 작가의 치밀한 상상력, 시대를 넘나들며 이야기를 끌어가는 힘, 수많은 문학적 역사적 지식, 그 속에서 스스로의 연구주제를 중심에 두고 해답을 찾아가는 과정 ... 이 모든 것들이 압축된 얇은 문고판 책 한권은 내 안에서 희석되기 힘들었다. 읽으면 읽을수록 길을 잃고, 다시 앞으로 돌아오면 또 다른 세상이 펼쳐지는 기분이었다. 나의 상상력이 작가와 함께 시공간을 넘어가지 못해 속상했고, 그녀가 이끄는 낯선 세상으로 이어지는 문을 열지 못해 답답했다. 책 후반부에 갈수록, 작가가 어느순간 답을 제시하며 책이 그대로 끝나버릴까봐 두렵기까지 했다. 


그렇게 반쯤 읽다다, 혹은 거의 마지막까지 읽다가, 다시 돌아와 읽다가, 어쨋든 이 작은 책을 손에 넣고 꽤 여러번 완독을 했다. 이제야 비로소 "정말 좋은 책입니다" 라고 추천을 할수 있게 되었다는 건 아니다. 이제야 비로소 작가가 풀어가는 수 많은 상상력들이 글의 기본 주제를 올라 타 어우러지고 있는것에 불편함은 사라졌다. 아마 내가 느꼈던 불편함은, 자신의 펜끝 하나로 고전과 문학, 그들의 작품과 삶을 좌지우지 할수 있는 능력에 대한 열등감이었던것 같다. 어디 그 뿐인가, 그녀를 찬사하고 그녀가 보여주는 세상을 가감없이 즐기는 "다른 사람들"과 나의 통찰력 사이에는 분명한 온도차가 있다는 씁쓸함 때문이었던것 같다. 


그렇게 이 책은 여러번 읽었으나, 아직도 제대로 읽지 못한 기분이 들기도 한다. 서술한 사실들과 작가의 주제는 중반부에 접어들수록 명확해지고 더 이상 현실과 혼재해 헷갈리지 않는다. 책의 전반부에서 고생스럽게 길을 잃고 다시 찾았던 탓인지, 읽다보면 점점 작가의 상상력에 내 머리를 모두 적시지 않아도 글 속의 길을 찾아갈수 있게 되었다. 어쩌면, 아직도 이 책을 완전히 내 것으로 만들지 못했다는 고백이기도 하다. 




이쯤에서 책 얘기는 그만두고, 이 책을 처음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 "다른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브런치 1.3만 구독자를 보유한 출간작가인 단어벌레님은 이 책을 읽어보게 싶게 만들었던 내게 영향력있던 "다른 사람들" 중 한사람이었다. 그녀가 삶을 대하는 방식이나 자신과 마주하는 시간을 담담하게 써내려간 에세이는 조용하지만 강하게 독자들을 끌어안는 힘이 있었다. 나도 처음에는 그 담백하지만 읽는 중간중간 가슴이 뻐근한 외로움의 시간들에 매료되었다. 글의 주제가 익숙하거나 때로는 나는 한번쯤 생각해본적이 있는 주제를 만나면 반가워서 설레는 마음으로 글을 잃다가 이내 힘이 빠져버린다. 과연 그녀의 눈은 사물 이면의 얼마나 깊은 곳을 바라보고 있는건지, 잠시였지만 같은 주제로 내 머릿속에 펼쳐졌던 이야기보따리를 서둘러 등뒤로 숨기고 싶을 정도였다. 바라보고 느끼는 것을 글로 옮겨내는 일에 그녀는 마치 한땀 한땀 뜨개질을 하듯 정성을 들였다. 그녀가 지은 문장을 한숨에 읽고나면, 어김없이 그 문장 처음으로 돌아가야 한다. 단어 하나하나에 담긴 세상은 그렇게 다시 돌아와 읽을때마다 더 깊이 더 은은하게 나에게 닿는 기분이었다. 


글을 쓰기 전에는 읽는 사람이었다는 작가의 말처럼, 실로 많은 서평과 책에 관한 글을 발행했다. 그렇게 많은 책을 깊이 있게 읽는 능력에 대한 일은 차치하더라도, 책속의 주인공과 세상속에 본인의 경험과 시간을 녹여내는 작업은 감탄스럽다. 나처럼 허덕이면서 책을 읽어치우기도 버거운 나에게는 분명 배가아플만큼 부러운 일이다. 그래서 그녀의 서평은 늘 에세이처럼 읽힌다. 사실 에세이를 쓰다가 잠시 책속의 내용을 빌린건지, 책을 얘기해보려다가 에세이가 된건지 그 경계에 있지만, 아무려면 어떻단 말인가. 그 누구의 서평보다 나에게 "이 책 궁금하지 않니?" 라고 말을 걸어오는데. 


브런치북 <안녕하세요 댈러웨어부인>은 버지니아 울프의 "댈러웨어부인", "등대로", "플러쉬", "자기만의 방"등 몇 권의 책에 대한 서평이자 에세이북이다. 버지니아 울프를 좋아한다고 몇번 언급한 글을 읽었던것 같기는 한데, 내가 느끼기에 버지니아 울프는 그녀가 흠모하는 작가인 동시에 소울메이트같은 작가이다. 버지니아 울프의 책은 그녀에게 친한 친구였을것이며, 책 속에 등장하는 수 많은 여주인공들은 버지니아 울프의 어딘가를 혹은 버지니아 울프의 엄마의 어딘가를 닮았지만, 그녀의 일부이기도 했다. 그녀는 책을 읽으면서 순간순간 자신의 모습을 찾아낸다. 그리고 그녀가 찾아낸 모습은 때로 쿵 하고 내 가슴을 내려앉게 만들만큼 나의, 우리의, 지금을 살아가는 여자들의 모습이기도 하다. 


자의에 의해 혹은 타의에 의해 서평을 몇번 써본적이 있지만, 난 서평쓰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작가의 입장과 독자의 입장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잡는 일이, 어느 한쪽으로 푹 하고 고꾸러져야 그제서야 마음이 놓이곤 하는 나같은 사람에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렇지만 단어벌레님의 브런치북 <안녕하세요 댈러웨어부인>을 읽다보면 나도 모르게 마음이 놓여 편안하다. 책 속의 클라리사, 램지부인, 릴리, 엘리자베스의 삶위로 버지니아 울프의 삶이 드리워져있고, 그 위로 단어벌레님의 삶이 어우러져 있지만, 구태여 어느 부분이 누구의 삶인지 가려낼 필요가 없었다. 그저 그 글 한편이면 충분했기 때문이다. 




버지니아 울프를 좋아하거나 좋아하고 싶다면, 버지니아 울프와 나 사이에서 기꺼이 손을 내밀어줄 글을 읽고 싶다면, 나는 조용히 이 브런치북을 내밀고 뒤돌아서고 싶다. 하지만 알아둬야 한다, 버지니아 울프보다 더 좋아하게 될 작가를 만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가지 더. 꽤 오랫동안 스스로가 쓴 글이 맘에 안들게 될수도 있으니 주의해야한다. |YJ 




커버이미지 Photo by Annelies Geneyn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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