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딸이 둘 있다. 너 꼭 닮은 딸 낳아서 당해보라던 엄마의 소원이 이루어지다 못해, 난 아마 곱배기로 당할것이 자명하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나에게 딸이 있어서 좋은거라고, 나중에 엄마에겐 딸이 최고라는 말을 한다.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내 딸들이 나에게 그런 존재가 될까라는 생각에 앞서, 난 우리 엄마에게 과연 괜찮은 딸인걸까 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 엄마는 둘도 아니고 하나있는 쌀쌀맞은 딸 덕분에 가끔은 꽤 외로웠을것 같다. 말한마디 살갑게 못하고, 엄마가 손을 잡아도 잡는둥 마는둥 하는 딸이었다. 엄마에 의하면, 엄마 말고 남한테는 그렇게 잘하면서 엄마한텐 싹싹하지도 않고, 애교가 있길 하나, 무슨일 있는것 같아서 얘길 시키면 대꾸도 잘 하지 않던 딸.
오늘 문득, 큰 아이를 재우고 돌아 나오면서 문득 그런 생각에 빠졌다. 저렇게 엄마가 세상에 전부이고, 엄마만 보이면 좋고, 엄마가 안보이면 슬프고, 쉬지않고 나에게 조잘거리는 저 녀석이, 어느순간 나에게 소원하게 쌀쌀맞게 굴면, 그러면 정말 찬 바람이 휑하니 지나가는 것처럼 허전하고, 마음이 시릴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면 엄마에게 난 그저 상상속의 딸일 경우가 많았던것 같다. 비행기를 타고 열시간이 넘는 거리에 살기에, 문득 보고싶어도 보기 힘들고, 문득 목소리가 듣고 싶어도 잠잘 시간인가 싶어 머뭇거리게 되고, 어디한번 함께 가고 싶어도 일 이년에 한번 만날날을 기약해야 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엄마와 함께 했던 몇번의 당일 여행이 기억난다. 한번은 내가 대학입시에 실패하고 재수를 막 시작할 몸 무렵, 엄마와 춘천에 다녀왔다. 배를 타고 소양호를 건너, 그 안에 청계사라는 절에 다녀왔었다. 대학 신입생의 꿈을 꾸던 딸이 다시 일년동안 어두침침한 입시생으로 돌아가게 된 것이 못내 마음에 걸린 엄마가 제안한 여행이었고, 엄마 기대에 못미친것 같아 죄송한 마음이 가득한 딸이 수락한 여행이었다. 여행 내내 우리 모녀는 별다른 말이 없었다. 그렇지만 코끝이 향기로운 바람과 봄햇살을 가득 받으며 우리 둘은 마음속으로 서로를 위로하고 있었다.
대학 4학년, 대학원 진학을 결정한, 단풍이 너무 아름다웠던 가을 어느날, 엄마와 난 경복궁과 삼청동, 북촌 길을 오랫동안 걸었다. 미래에 대한 이렇다할 확신이 없던 내가 어렵사리 내린 결정에, 엄마는 묵묵히 내 결정을 존중해주었다. 이렇게 삶의 한 고비 한 고비를 꾸역 꾸역 넘어가는 딸에게, 엄마는 그때 마다 작은 쉼표를 주고 싶었던것 같다.
또 어떤날은, 엄마와 둘이 강화도에 드라이브를 했다. 빨간 노을이 아름답다 못해 슬펐던 저녁무렵, 외포항으로부터 강화 시내쪽으로 돌아오며, 우리 뒤켠에 남겨진 붉은 해를 우린 오랫동안 느꼈다. 유학을 결정할 무렵이었다. 또 한번의 인생의 전환점을 맞은 나는 여러가지로 생각이 참 많았고, 그땐 엄마도 나름대로 힘든 일이 많았다. 그렇지만, 난 엄마의 힘든 것을 일부러 모른척, 무감각 한척, 나와 상관없는 일인척 해버렸다. 그때, 가슴이 시린 바람이 휑 하니 지나간 기분이었다고, 엄마는 나중에야 말해줬다.
그러고는, 큰 아이 낳을때 산후조리를 도와주러 미국에 오셨던 엄마. 아빠와 남편에게 아이를 잠시 맡겨두고, 엄마와 쇼핑몰에 잠시 다녀왔다. 물건을 보고 사고 했던 시간 보다, 둘이 떠들고 얘기하느라 시간이 모자랐다. 너무 오랫동안 둘만의 시간을 갖지 못햇던 우리 모녀에게 아기가 깨기전까지 돌아와야 했던 세시간의 외출시간은 아쉽기만 했다. 그 겨울, 엄마와 나는 어디서든 마주치기만 하면 이야기 보따리였다. 새벽이건 밤이건, 거실이건 침실이건 화장실이건, 떨어져 산지 7년만에 두개월 남짓 함께 지내게 된 모녀는 서로에게 너무 목말라 있었다.
이제 딸이 둘. 그리고 우리 엄마는 외 손녀가 둘. 엄마와 나의 둘만의 다음 여행은 언제가 될지 요원하기만 하다. 어디가 되었든 엄마와 여행가서 세밤만 자고 먹고 구경하고 돌아오고 싶다. 이번에는 조금 철이 든, 예전보단 조금 살가워진 그런 딸로 모실수 있을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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