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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와이제이 Feb 03. 2017

주방에 걸어둔
종이달력

겨울방학, 성탄절, 두 아이의 생일, 결혼기념일, 그리고 설날까지…크고 작은 일이 빼곡했던 연말과 새해 첫달이 지나고, 2017년의 두번째 달에 접어들었다.


기억을 더듬어 보면 2009년 무렵이었던것 같다. 

해마다 사용했던 다이어리가 2008년이 마지막이었던 것을 보면. 

아마 그즈음 부터 다이어리에 꼬박꼬박 기록하던 습과 대신, 전화기와 컴퓨터에서 두루 이용할 수 있는 전자 캘린더를 사용했다. 그러면서부터 나는 더이상 다이어리도 사지 않았고 종이 달력도 걸어두지 않았다. 

가족의 생일이나 개인 약속, 원고 데드라인, 남편의 출장이나 아이 유치원의 행사들을 캘린더에 넣어두면, 삼일전 혹은 하루전 자동으로 나에게 알려주었다. 

스스로 못챙기는 많은 일들을 꼬박꼬박 성실하게 미리 귀띰해주니 다이어리를 펼칠 수고도, 혹시 놓쳤을까봐 재차 확인하는 불안감도 덜해졌다. 

어찌되었거나 전자 캘린더 덕을 보며 살아왔던 것이다. 


하지만, 캘린더가 리마인드 해주는 약속이나 생일, 행사들에 치여가며, 오늘이 몇월 며칠 무슨 요일이라는 것을 인지하기도 전에, 그저 “오늘”은 큰애 유치원에 책을 들려보내는 날이고, 오후 2시엔 치과에 가야하고, 저녁 7시엔 식사약속이 있는 날 정도로 흘러갔다. 

그렇게 하루 하루 크고 작은 일정과 마주치며 지나고 나서, 어느날 갑자기 

“아, 벌써 날짜가 이렇게 됬어?”를 외치곤 했다.



2017년 새해를 준비하면서, 지난 연말 나는 종이 달력을 준비했다. 

실로 오랜만에 내손으로 붙여두는 달력이었다. 

내가 가장 시간을 많이 보내는 주방과 책상옆에 서로 다른 모양의 두 개의 달력을 붙였다. 

그저 글자와 숫자, 그리고 여백이 많은 단순한 달력이었다. 

거기에 굳이 누구의 생일이나 점심약속을 적어둘 필요는 없었다. 

허드렛일을 담당할 캘린더는 따로 있으니까.


아침에 일어나서, 설거지를 하다가, 커피를 마시면서, 저녁식사를 준비하면서, 아이들에게 우유를 꺼내주면서, 책상을 지나 욕실로 들어가면서, 옷을 갈아입으면서 … 

나는 하루에도 몇번씩 내 눈길이 지나는 곳에 있는 달력을 멍하니 바라보는 일이 잦아졌다. 

달력을 바라보면 으레 조그만 숫자들 가운데서 시간을 들여 오늘을 찾아낸다. 

내가 찾아낸 오늘은 내가 지금 이만큼 쯤을 지나고 있구나 알려 준다. 

다가올 어떤 약속이 걱정 되어서도 아니고, 내가 잊었을 중요한 모임날짜를 확인 하려던 것도 아니었다. 

그저 눈길이 멈춘 곳에서 발견한 오늘은, 

어디쯤 사는지 가끔 되새기기 조차 번거로운 나의 하루를 찾아내 준것 같아 반갑다. 


달력을 들여다 본다고 해서 시간이 천천히 가는건 아니다. 

그렇지만 적어도 달력안에 서른개 즈음의 숫자 속에서 오늘을 찾아보고, 

내가 찾은 오늘 앞뒤의 날들을 눈대중으로 가늠하면서, 

이상하리만치 내가 지금 지나고 있는 하루에, 그 시간에 안심한다. 

오늘 하루, 이 하루를 새로이 마주하는 기분. 

잃어버렸던 오늘을 찾는 기분. 

달력을 들여다 보며 그런 기분을 가졌다.


그래서 오늘부터는, 또 새로운 스물 여덟개의 오늘을 맞이하게 되었다. 

이런 저런 일들로 빼곡한 이번달도, 지나가는 길목마다 “오늘”로 살아갈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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