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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와이제이 Jul 17. 2016

초가을 어느밤

 

한번은 그런 일이 있었다.


음력으로 8월 15일 추석이 지나고도 다음 다음날인데, 주방을 지나면서 바라본 달빛이 여전히 너무 밝고 풍성해서 무작정 달을 봐야겠다고 생각했던 날. 


늦여름은 짧게 끝나 버렸다.

어느새 아침저녁으로는 긴바지와 긴셔츠를 입고도 쌀쌀한 공기를 막아내기 어려운 날씨가 되었지만, 

두툼한 겉옷에 양말을 신고, 그리고 담요도 하나 챙겨서 패티오에 있는 내 자리로 향했다. 

부산스러운 나에게 뭐하냐고 묻는 당신에게, "달맞이"라는 대답을 던지는 둥 마는둥 냉장고를 열었다. 

술을 별로 좋아하지는 않지만, 달을 보는데 그래도 약간의 알콜이 함께해야 맛일것 같아, 

마시다 만 와인 한잔과 안주거리를 손에 잡히는 대로 주머니에 넣고 나섰다.


모두 잠든 깊은 밤이 아닌데도, 불을 환히 밝힌 집은 없었다. 

고요했고, 바람도 잠잠했다. 

공기는 차가웠고, 하늘은 맑았으며, 달은 오른쪽 위가 살짝 기운채로 여전히 그 빛을 내는데 여념이 없다. 

옛 시조에 나오는 것 마냥, 달이 하늘에 하나, 연못에 하나, 술잔에 하나, 그리고 내 연인의 눈에 하나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달빛에 매료되는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담요로 무릎을 감싸고 앉아 있는데도 싸늘했다. 

냉장고에서 나온 와인이 아니라, 따뜻한 정종 한잔 이었으면 더 좋았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때 당신이 문을 열고 나와 내 옆에 앉았다. 

어디서 후드티는 하나 걸쳤지만 여전히 반바지 차림의 당신은, 내 옆에 앉자마자 담요를 끌어 당겨 덮는다. 

나를 휙 하니 바라보더니, 내 와인도 한모금 뺏어 마시고, 내 주머니에서 아몬드도 몇개 꺼내 먹는다.

그러고 얼마동안 가만히 앞을 보며 아무말 없다가는, 뜬금없이 쓰던 제안서 얘기를 꺼낸다. 

이 분위기있는 달빛 아래 사랑하는 아내와 조용히 앉아서, 일 얘기라니... 

달빛 뿐인 어두운 밤이라 당신은 보지 못했겠지만, 내 입은 가만히 웃고 있었다. 


사실 당신이 얼마를 견디지 못하고 그런 얘기들을 할줄 알았다. 

그게 당신이라는 것을 이제 알수 있었다. 

나와 같은 감수성을 가지고, 같은 생각을 하고, 같은 느낌으로 느끼지 못하지만,

그럼에도 내 옆에 앉아서 얼마간이라도 그 시간을 버티려고 노력해 주는 사람이 바로 당신이라는 것을 말이다.

말은 하지 않아도 그게 당신만의 애정표현이라는 것도 이제는 알수 있었다. 

그리고, 그 노력이 그렇게 오래 가지는 못한다는 것도 (피식) 말이다. 


뜬금없이 꺼낸 일 얘기에, 이렇다할 대꾸를 않고 하늘만 시종일관 바라보는 내가 재미없는지, 

당신은 중얼중얼 투덜투덜 거리더니, 급기야 추워서 못견디겠다고 들어가버렸다. 

당신이 떠난 자리를 난 지키며 그렇게 달을 좀더 바라봤다. 

처음에는 달빛으로 보이지 않던 주변 경관이 하나씩 눈에 들어온다. 

원래 없었던 것이 아니라 잠시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달 덕분에 보이기도 또 보이지 않기도 한다. 


올해 패티오는 다 썼다고 이제 테이블이며 의자를 치우자고 했는데, 

여름이 지나고 초가을 밤의 달구경이 이렇게 매력적일줄은 몰랐다. 

비록 추워하며 내 와인만 다 마시고 성급히 자리를 떠나버린 당신이었지만, 

그런 당신이 있어 더 좋았던 달보던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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