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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와이제이 Feb 28. 2020

 이 집 덕분이었다

 안녕 나의 집, 안녕 나의 지난 십년

처음 이 집에 왔을때에는 거실에 가구도 하나 없이 텅 빈 집이었다.


갓 부부가 된 어른 둘이서 지내기에는 여백이 많았고, 그 여백은 급하게 마련한 몇가지 가구로는 채워지지 않던 허전함이 있었다. 이 집에서 앞으로 어떻게 살게 될지 조차 막연한 그런 시간이어서 그랬을까, 어디에 앉아 있어도 어색함이 가시지 않았다.


그래도, 동쪽으로 바로 앉아 있는 집이라, 아침 내내 해가 가득 들어오던 주방에 서 있으면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햇살을 받으며 서 있으면 온 몸이 금새 기분 좋을 정도로 따뜻해지곤 했는데, 그러다 보면 막연함과 허전함도 이내 나른하게 사라지는 기분이 들었다.




조용하고 때로는 적막하기조차 했던, 자질구레한 살림이라고는 하나도 없던 이 집에서, 생후 몇개월 되지 않았던 반려견은 전력 질주를 했다. 대낮에는 거실 한복판에 함께 누워서 서로를 배개삼아 껴안고 낮잠을 자기도 했고, 계단 위 아래로 공을 던져가며 이리뛰고 저리뛰고 놀아도 넉넉했다.


좁은 아파트에 살면서 답답해하고, 혹시라도 밤에 짖으면 구박받던 반려견은 신나게 뛰어다니고 또 아무데서나 푹 쓰러져 낮잠을 잤다. 햇살이 좋은 날에는, 주방에서 연결되어 있는 데크에 나가 온몸이 뜨끈뜨끈하게 일광욕을 하고, 겨울엔 눈밭에서 용변을 보느라 눈속에 발이 푹푹 빠지기도 했다. 목욕을 오랫동안 안시켰을땐, 콤콤한 개 냄새가 카페트에 거실 매트에 배어 있는것 같았는데, 난 그 냄새를 맡으면 비로소 이 집이 우리 셋이 사는 집처럼 느껴졌었다.




그러다가 첫 아이를 가졌다. 아이와 함께 살아갈 앞으로서의 시간은 더더욱 막막했던 우리 부부는, 임신기간 동안 주방 리모델링을 하면서 아이와 지낼 공간을 상상했다. 엄마 아빠가 처음 되보는 우리는, 뭘 사야할지 뭘 준비해야 할지도 몰랐지만, 우연하게도 핑크색으로 칠해두었던 방하나가 자연스럽게 첫 딸의 방으로 준비되었다. 덩그런히 비어있던 방에, 모빌도 달고, 아기 침대도 들여놓고, 보드라운 아이 물건들로 채워나갔다.


그렇게 반려견과 큰아이, 그리고 둘째 아이까지 함께 하게된 집에는 더 이상 여백과 적막함은 없었다. 요란한 원색의 아이 물건이 곳곳에 늘어져 있고, 투박한 아기 의자가 식탁앞을 차지하고, 알록달록하고 두꺼운 아이들 책에 소리나는 장난감에, 집안 어디 할것 없이 어지러웠다. 그래도, 앙앙 하는 아기울음소리가, 깔깔 하는 아이들 웃음소리가 가득했고, 그 어느때보다도 활기차고 바쁘고 또 정신없는 시간을 견뎌왔다.



이사를 앞두고 짐을 정리하느라 들른 집안 곳곳에서 수 많은 기억들이 쏟아져나왔다. 아이들 옷을 정리하러 들어갔던 아이들 침실에서는 눈도 못뜬 갓난 아이때의 아이들 모습이 떠올랐고, 아래층 티비 곁으로 걸어가니 어느 해인가 사람들을 잔뜩 초대해서 노래방기계를 틀어 신나게 놀던 날이 떠올랐다.


그리고 더 많은 작은 기억들.


오후 녘 거실쪽 높은 아치 모양의 창으로 햇살이 들때, 소파에 기대 앉아서 아이와 함께 책을 읽어갔던 일. 계절에 따라 색을 달리하며 흘러가는 세월을 담아주던 그 창 밖으로, 스쿨버스를 타러 가는 딸아이 모습을 눈으로 쫒다가 손을 흔들어주기도 했고, 눈사람 만드는 아이들 모습을 바라보기도 했었다. 그 창옆에 서서 바로 밖에 있던 큰 나무에 둥지를 튼 새들이 요란하게 지저귀는 소리에 아침잠을 떨쳐버리곤 했었다.


웽~ 하고 커피를 갈면, 넓지 않은 주방 가득 커피 향기가 났다. 그렇게 만든 커피를 손에 감싸고 주방문에 드리워진 커튼을 열며, 매번 눈을 뗄수 없이 아름다운 일출을 볼수 있었다. 그 뿐인가, 저녁을 할 때쯤엔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을만큼 마음을 훔치는 일몰도 빼놓을 수 없다. 


주방은 내가 제일 많이 머무는 공간이라 더 많은 기억들이 있다. 요리책 펴가며 실패와 성공을 거듭했던, 이틀에 한번씩은 밥하기 싫어했던, 오늘 머 먹을까 중얼거리며 냉장고 문을 열고 멍하니 바라보던 내 주방. 아이 이유식 만들겠다고, 케익 한번 만들어보겠다고, 애들과 베이킹을 하겠다고 온 주방을 전쟁터처럼 어질러졌던 곳. 탕수육이나 돈까스, 아니 생선이나 삼겹살이라도 구운 날에는, 온집안 곳곳 냄새에 화재경보기까지 울려서 다들 귀를 막고 창을 열어 환기를 시키던 기억.


아래층 책상까지 가지 않고, 식탁 한 모퉁이 내 자리에서 책도 보고 일을 하다가, 때로는 눈을 들어 창밖 공원을 넋놓고 바라보던 일. 그 식탁은 가까운 사람들을 불러, 어설픈 솜씨로나마 음식을 준비하고, 함께 둘러 앉아 밥을 먹고 얘길 나누던 곳이기도 했다. 웃음과 이야기, 약간의 취기와 분위기가 식탁위로 몽글몽글 떠올라 식탁 위 노란 조명으로 사라지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던 어느날.


둘째가 세살 정도 되면서부터 시작한 매주 금요일 무비나잇에, 애들이 자기 이불, 배개, 인형을 2층에서부터 바닥에 질질 끌고 내려와, 소파에 한자리씩 차지하고 영화를 보던일. 영화가 미처 끝나기도 전에 잠든 둘째를 안고 이층까지 올라와 재우며 힘들어 하던일. 아이들과 관련된 기억은 더 선명하고 소리까지 들리는 것처럼 생생하다. 기저귀 차림에 기어서 계단을 올라가던 아이들 엉덩이. 쉬 가릴때 즈음에는 혹시 거실 카페트에 실례를 할까봐 조마조마 했던 일. 좀더 커서는 계단 위에 서서 자기 업고 내려가라고 있는 힘을 다해 "엄마" 부르던 아이들 모습. 아이들 이불을 챙겨주고 나서 잠든 얼굴에 입을 맞추고, 소리나지 않게 문을 살며시 닫고 나가던 밤.


여름 내내 가지치기를 했던 나무를 태워 없애야 한다는 핑계였지만, 해마나 한두번은 남편과 둘이서 불을 피우고, 타닥 타닥 나무 타는 소리를 들으며 이 얘기 저얘기 얘기를 나누던 시간도 떠오른다. 때로는 아이들과 함께 마쉬멜로우를 구워 먹었는데, 깜짝할새에 마쉬멜로가 까맣게 타버리거나 구워진 마쉬멜로를 조심스레 곁으로 끌어오다가 떨어뜨려 울음이 터진 아이들 덕분에 우리는 웃음이 터지고 말았던 일 같은건 잊혀지지가 않는다.


해가 잘드는 창 옆에 쪼르륵 줄지어 있던 작은 화분들. 물만 잊지 않고 줬을 뿐인데, 예쁘게 잘 자라고 꽃도 피워줘서, 물을 줄때마다 고마워 고마워 말했던 일. 앞뒤 정원에 나무를 심고 꽃밭을 만들다가 힘들어 지쳤던 일. 도와주겠다고 나서던 두살 다섯살 꼬마들 덕분에 일이 두세배로 늘어났지만, 작은 꽃삽을 들고 나와서 열심히 땅을 파던 아이들을 보며 웃어버리고 말았던 일.

 

보름이 되면 큰 보름달이 우리집 뒤켠으로 떠올라, 주방문에 기대어 달구경을 하던일도 기억난다. 어느해 가을에는 크고 탐스러운 보름달을 보다가 담요와 커피를 들고 데크로 나가 남편과 한참동안 달구경을 했었다. 노란 달빛이 남편의 머리카락과 어깨와 코끝에 내려앉던일도 남편이 눈치 안채게 잠시동안 눈을 감고 짧게 기도를 했었는데, 그때 난 무슨 기도를 했을까. 가족의 건강과 행복을 같은 그런 기도였겠지 아마.


뒤늦은 설거지를 마치고, 행주를 빨아서 탁탁 소리나게 널어둔 다음, 눈으로 주방부터 거실을 거쳐 현관까지 한바퀴 쭉 둘러보고나서, 주방 불을 딸깍하고 끄고 올라갔다. 이게 어쩌면, 너도 나도 하루 또 잘 지냈다는 집과의 굿나잇 인사라는건 아마 나만 가지고 있는 비밀스러운 기억일 것이다.




살면서 어느날, 어느 여러날,

속상하고 힘들던 날,

내가 작고 초라하다고 느껴지던 날,

때로는 매일 다를바 없는 날들이 답답하다고 느껴지고

때로는 정신없는 하루하루가 끝났으면 좋겠다고 느꼈던 그런 날,

머리속으로 스며드는 상념때문에

가슴이 뛰고 울고 싶던 날,


그런 어느날에는,

편한 신발을 신고 대문을 열고 나가 집 주변을 휘휘 한바퀴 돌거나,

파릇파릇 안간힘을 쓰며 싹을 내고 있는 나무들을 한번 매만져주고,

바람에 몸을 싣는 꽃들을 유심히 바라보고 들어오곤 했다.


그런 다른 날에는,

집안 곳곳에 돌아다니며 부러 이것 저것 꺼내어 만지작 거렸다.

욕실의 수건을 다시 꺼내어 반듯하게 접어서 걸어두고,

소파위의 담요와 쿠션을 손으로 모양 잡아 자리에 두고,

보이지 않지만 먼지가 있을 구석구석을 청소하고,

거실 탁자위의 책들을 반드시 탁탁 높이를 맞춰 정돈하고,

어느 서랍이든 열어서 그 안에 있던 물건을 모두 꺼내어 다시 차곡차곡 정리하고 나면,

그 요동치던 마음이 꽤 차분해졌었다.

집이 나를 위로한 셈이다.


그리고 더 많은 날은,  

우리 가족 모두 이 집에서 웃으며 얘기하며 살고 있는것이, 신기하고 감사하고 또 행복해서 뭉클했었다.   

집이 나에게 감사를, 고마움을 가르쳤다. 집에게 이렇게 신세를 졌다.




우리가 결혼해서 처음 살았던 집, 첫아들 반려견을 키웠던 집, 두 아이를 낳고 어린시절에 함께 살았던 집. 반려견의 강아지 시절, 아이들의 어릴적 모습, 한때 함께 살았던 물고기들, 우리 부부의 30대, 우리의 웃음, 사랑, 행복, 기쁨, 그리고 좌절, 걱정, 불안, 아픔, 희망, 말로 표현하기에 너무 많고 복잡했던 수 많은 감정이 한데 섞여서 만들어내는, 우리집이 품고 있는 따뜻하고 노란 온기 덕분에 내, 우리가, 이렇게 자랐다.


짐을 박스에 넣고, 걸려 있던 그림을 내리고, 텅 비어있는 선반을 보니, 기분이 이상했다. 아이들과 이야기 했다. 이사하는 날, 집안 모든 곳을 우리 모두 다 같이 둘러보면서 집과 인사를 나누자고. 내 눈길이 닿는, 아기 시트가 놓여있던 화장실 구석부터, 화분이 놓여 있던 거실 창틀까지, 내 눈길을 그윽했고 또 애틋하겠지.


마루 바닥에 있는 긁힌 자국이 언제 생긴건지, 주방 어디쯤을 밟으면 유난히 삐걱하는 소리가 들리는지, 아래층 어느 창문이 부드럽게 열리지 않는지, 가지와 잎이 짧게 잘려진 나무는 이동네 사는 토끼들이 제일 좋아하는 나무라 그렇다는것. 나만 우리 가족만 알고 있는 우리집이 이곳 저곳이 많은것 만큼, 집만 아는 우리의 비밀도 참 많겠지. 한밤중에 침대에 실례를 한 아이덕분에, 아이 옷벗겨서 샤워시키고, 세탁기 돌리고, 매트리스 닦느라 스 벽에서 아래층 위층을 얼마나 오르락 거렸는지 뭐 그런 비밀들.




이렇게 내 집과 인사를 준비하다.

이사하면서 유난이라면 또 그럴수도 있겠지만, 내 삶의 한마디를 함께 했던 집이기에 이정도 유난은 그럴만 하다. 치열하고 바쁘고 어리둥절하고 소란스럽던, 내 삶의 한마디가 또 이렇게 지난다.


이사가서도 한동안 많이 그리워하겠지만,

이제 우린 또 다음 마디를 향해 뒤를 돌아보지 않고 살아가겠지.  

다음 집에서는 훌쩍 큰 아이가 사춘기를 지나고,

우리 부부도 젊을때 만큼 날을 세워 서로의 의견을 관철시키느라 목소리를 높이지 않겠지.

그 언젠가는 우리 멍멍이도 깊게 잠을 자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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