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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와이제이 Mar 13. 2020

그와 다툰 다음 날  

솔직히 말하자면, 

남편과 다툰 다음날을 나는 조금 즐긴다. 


말을 할수도 그렇다고 안할수도 없는 냉랭한 분위기가 못내 불편하고 

서로 보는 눈치가 전혀 아무렇지 않다면 거짓말이지만,

마음을 달리먹고 이 시간을 한번 즐겨보자라고 생각하면, 

그 틈속에서 나름대로 재미있는 일이 생기기도 한다.  


남편과 사이가 좋을때는 실수 투성이에 허점을 들어내보이기 일쑤인 나이지만,

사이가 불편할 때는 다르다. 

어쩌면 결혼하기 전 서로 조심스러울때처럼, 

등과 목을 꼿꼿이 세우고 턱을 한껏 높이 든 다음에, 

입술은 조용하지만 단호하게 다물고, 

어쩌면 우아한 휴앤를 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다. 


눈을 아주 살짝만 아래로 내려 남편과 눈빛이 마주치지 않을 정도로만 뜨고, 

군더더기 대화가 필요 없을 정도로 깔끔하게 행동하고,

내 할일을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해내고, 

또 불필요하게 마주치지 않도록 소리도 나지 않게 슬리퍼를 삭삭 끌고 

같은 공간에 있기를 피한다. 


분위기를 어떻게든 풀어보려고, 

평소에는 묻지도 않던 질문을 하기도 하고, 

밥먹을때나 집을 나설때 하지도 않았던 인사를 크게 하기도 하는 남편을 두고, 

나는 미동도 하지않으며 속눈썹하나 까딱하지 않는다.

이러한 몸동작으로, 

나는 당신과 이야기를 하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음을 

우아하게 선포하는 것이다. 


남편의 잔꾀 예컨데, 

예기치 않은 허탈한 웃음을 야기한다거나, 

아이들을 통해서 상황의 전개를 달리해보려는, 

그런 속임수에 절대 넘어가서는 안된다.

정신을 잘 차리고 있지 않으면, 

내가 왜 어제 이 남자와 다퉜는지, 

하마터면 잊어버릴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번엔 꽃 정도로, 카드 정도로도 어림없다. 

난 오늘 하루정도는 이렇게 고고한 몸짓으로,

"당신같은 사람과는 단 한번 대화를 섞은 일도 없었던것 마냥 지낼테니 마음대로 하셔" 

라고 마음속으로만 생각하며,

남편이 저만치에서 걸어오자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그러나 군더더기 없는 동작으로 

방을 빠져 나갔다. 


또 하루가 지나면 이런 저런 이유로 감정을 풀어야 겠지만,

그와 다투고 난 다음날 하루정도는 

이런 분위기를 진정 즐기고 있다.


Photo by Nick de Partee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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