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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와이제이 Sep 16. 2020

가구조립의 교훈

당신과 나의 세상 

유학생활을 시작하면서 혼자 책상도 조립하고, 내 키보다 더 큰 책장도 조립했다. 


유학생활을 하는 모든 여학생들이 그러는건 아니었는데, 

난 당시에 한국에는 없던 IKEA라는 가구점이 신기했고, 

집에서 내 손으로 가구를 조립할수 있다는 사실에 그만 매료되었다. 

매뉴얼을 보고 순서대로 조립하는건 마치 어릴때 가지고 놀던 프라모델 조립하던 기억을 떠올리게 했고, 

완성된 가구를 매일매일 사용한다는 것이 주는 뿌듯함을 잊을수가 없었다. 

물론 그때는 지금보다 훨씬 어렸을때이니 힘도 좋았고, 

오로지 가구조립에만 전념할만한 시간적 여유도 있었다. 


그러니까 하고 싶은말은, 나는 가구 조립 같은걸 꽤 좋아하는 여자였다. 




얼마전 이사를 하고 아이들 방을 따로 나눠주면서, 각자 침대 옆에 둘 작은 서랍장 두개가 필요했다. 

이동네 IKEA는 지난 3월부터 5개월동안 폐쇄되었다가 최근에 문을 다시 열기는 했는데, 

괜히 찝찝한 마음에 배송을 시켰다. 

한참을 기다려서 배송 되어온 박스 두개를 거실에 옮겨다 둔 남편은, 

미팅시간이 다되어 방으로 들어갔고(아직도 재택근무), 

아이들도 모두 온라인수업 시간이라 자리를 떴다. 

멀뚱하게 거실에 남아있던 내 눈에 거실 한중간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박스 두개가 들어왔는데, 

'어 이거 내가 해야되나?' 혼잣말을 한 후, 커터칼을 찾아 박스를 열기 시작했다. 

'에이 뭐 조그만 서랍장 두개쯤이야. 아무것도 아니지' 


그 이후로 난 거의 3시간 가까이 망치와 드라이버를 끼고 그 자리에서 빠져나오질 못했다. 

옛날에는 이 나무 부품들이 이렇게 무거웠던것 같지 않은데, 

십오년 세월이 흐른 지금의 나는 뭐 하나 들라치면 “아이구” 소리가 저절로 나왔다. 

분명히 순서대로 했는데 제대로 들어가야 할 서랍은 들어가지가 않고, 

나사를 풀었다 조였다 같은 과정을 몇번이나 되돌아갔다. 


'아니 IKEA 가구가 원래 이렇게 조립하기 까다로웠나. 옛날에는 금방 했던것 같은데.' 

하루에 책상, 서랍장, 책장 이거 다 조립하고도 아무렇지도 않았던것 같은데 말이다. 

올해 만 5살인 둘째가 쉬는 시간에 찾아 오더니, 엄마 많이 힘들어 보인다면서 어깨를 만져줬다. 

평소에 안흘리던 땀까지 흘렸다. 


드디어 두번째 서랍장 뒷쪽 합판을 망치로 박는 마지막 단계까지 마치고, 

나는 그 자리에 대자로 누워서 일어나질 못했다. 

나사를 조이고 돌리느라 손가락과 팔목이 아프고, 

무거운거 나무합판을 들었나 내렸다 했더니, 어깨랑 팔까지 꼼짝도 못할 지경이었다. 

거실에는 박스, 포장재, 비닐, 공구가 늘어져있고 먼지투성이인데 치울 힘도 없었다. 


그때 갑자기, 

갑자기 휙 하고 스쳐 지나가는 장면이 있었다.


어느날인가 남편이 가구 조립을 마치고 지금의 나와 흡사한 자세로 드러누워 있을때, 

나는 그 근처를 별 감흥없이 지나가면서, 

다 했으면 얼른 치워 누워있지말고. 박스 재활용에 갖다 버리고!” 해버렸던 내 모습. 

입밖으로 내지는 않았지만 '아니 저거 조립하고 뭘 저렇게 힘들다고 그래?'라고

마음속으로 생각했던 또한 고백한다. 


아니, 내가 대체 왜 그랬을까. 




생각해보니, 결혼과 함께 나는 더 이상 가구 조립은 하지 않았다. 


지난 십년동안 사들인 IKEA가구들이 적지 않았는데, 

나의 역할은 스토어에 가서 맘에 드는 걸 고르고 손가락으로 가리키는것 까지였다. 

그러면 선반에서 제품을 꺼내어 카트에 넣고, 계산대에 가져가고, 차에 싣고, 집에 가져와서, 

조립하고, 포장재 정리하고, 제자리에 넣는 것은 남편의 몫이었다. 

그럼에도 일의 속도가 느릿느릿한 남편에게 이 전 과정을 맡겨놓고, 

내 속도대로 진행되지 않아서 불평했던 적 또한 많다. 

나는 사온 물건은 바로바로 자리를 찾아 넣어줘야 하는데, 

남편에게 맡기면, 차에서 꺼내는데 하루, 박스 열고 조립하는데 하루, 치우는데 하루는 걸리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가구조립 말고도, 결혼하면서 자연스럽게 남편의 일이 되어버린게 많다. 

매주 큰 쓰레기통을 내놓는 일, 잔디를 깎고, 눈을 치우는 일, 큰 청소기를 돌리것도 남편 몫이고, 

함께 다닐때 운전은 거의 남편이 한다. 

힘이 많이 드는 일들이니 당연하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나에 비해 그다지 힘이 “세지” 않은 우리 남편이 그간 고생이 심했겠다. 


물론, 대부분 그 외의 집안일은 내가 한다. 

그리고 집안일 하는거 몰라주면 입이 이만큼 나와서 툴툴 거렸다. 

왜 장은 꼭 내가 가서 봐야하고, 

밥이나 청소는 안도와주는 거냐고 한번씩 힘에 부칠때마다 얘기하곤 했는데, 

알고보니 남편도 꾹꾹 참으면서 해왔던 남편만의 일이 적지 않았던 것이다. 


남자가 할 일과 여자가 할일을 나누자는 얘기가 아니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집을 꾸려가면서, 

집에서 해야할 여러가지 일들은 자연스럽게 서로 나눠갖게 되었다. 

그러자고 한자리에 앉아서 약속한것도 아닌데 그렇게 되었다. 

자동차나 은행관련 업무는 남편이 보고, 

병원이나 애들 학교 관련한 일은 대개 내가 챙긴다. 

정원의 나무와 꽃은 남편이 가꾸고, 

집 안의 꽃 화분들에 물을 주고 마른 잎을 떼어주는 것은 내 몫이다. 

하다 못해, 아침에 일어나서 커튼을 걷고 블라인드를 올리는 것은 내가 하는 일이고, 

밤에 문단속을 하고 블라인드를 내리고 불을 끄는 것은 남편이 한다. 


한번씩 남편에게 기분이 상하면, 

결혼의 단맛은 남편만 보고, 나는 결혼의 쓴맛만 보는 것 같았다” 는 

박혜란의 [결혼해도 괜찮아]에 나오는 문장이 구구절절 맞다고 느껴졌었다. 

해도해도 끝이 나지 않는 육아와 살림은 내 뒤만 졸졸 쫒아다니는것 같았다. 

“오늘 저녁 머 먹을까?” 물어도 “아무거나 간단한 걸로” 라고 말해버리고,

차려놓은 식탁에 '입'만 가지고 오는 남편이 야속할 때가 많았다. 

그러나 어쩌면 우리는 서로 "자기가 할일"을 해가면서 여기까지 온 거였다. 




미팅 중간에 커피를 가지러 나온 남편이, 

누워있는 나를 보면서 눈을 똥그랗게 뜨고 지나간다. 

나는 누운채로 남편 다리를 두 팔로 감싸안고, 


여보 .. 그동안 가구 조립하느라 진짜 수고 많았어. 

당신 정말 힘들었겠다. 진짜 고마웠어. 이렇게 힘들줄 몰랐어” 했다.

 

겨우 이거 두개 해놓고 그러냐” 면서 두번째 손가락을 까딱까딱 나를 가리키는 남편 모습을 보니까, 

쿨하게 쓰레기까지 다 치우고 생색내지 말것을 괜히 오버했나 싶다.


그래도 고마워. 

앞으로도 계속 각자의 일은 각자 열심히 하기로. 

당분간 가구조립등으로 생색 내더라도 그래도 받아줄게. 


#남편 #부부 #십년차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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