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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와이제이 Sep 17. 2020

그래도 내편

내 비빌언덕은 당신 뿐

내 남편은 열에 아홉번은 내 편이 아니다.

그렇다고 딱히 다른 사람 편도 아니니 이건 다행이다. 

그럼 누구의 편이냐, 

"정의"의 편이다.


본인의 말을 빌리자면, 

다양한 의견을 객관적으로 고려해서

한쪽으로 편향된 정보를 지양하겠다는 것이다.


다시 풀어 말하자면,

아니 오늘 그 아저씨가 말이야”로 시작하면서

얼굴이 울그락 푸르락, 목소리가 쩌렁쩌렁, 

혼자 얼굴로 일인 다역을 연기해가며 

내가 오늘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 일을 겪었는지

내가 오늘 얼마나 이상한 사람을 만났는지를 말하면,


쌩하다못해 얄미움 가득한 표정으로

그거야 당신 생각이지

그 사람은 그렇게 생각 안할수도 있지” 하면서

벌겋게 달아오른 나에게 찬물을 끼얹는다.


얼떨결에 그 찬물을 맞고나면,

내 “화”의 대상은 “그 이상한 아저씨”가 아니라

아내의 감정하나 세심하게 읽지 못한채

객관이니 이성이니 찾으면서 

말 한마디로 매 열대를 버는 

매정한 “남편”에게로 향한다.


이런 패턴이 계속되면 

찬물맞기 싫은 나는 남편 붙들고 그런 얘길 그만해야 하고,

아내에게 잔소리 듣기 싫은 남편은 일부러라도 아내가 듣기 좋은 말을 해줘야 하지만,

우리 부부는 십년째 참 일관성있게 

팽팽하게 본인의 노선을 지켜나간다. 


나는 계속 “이상한 아저씨 아줌마, 그리고 이상한 세상”에 대해서 얘길 털어놓고,

남편은 객관과 이성의 신으로 빙의하여, 

모든 다양한 인류와 심지어 동식물의 의견까지 반영하여,

아내의 편을 안들어준다. 


그래도 열번에 한번 꼴로, 

투덜거리는 내 얘기를 듣자마자 앞뒤 안가리고, 

그사람 진짜 이상하네, 당신이 속상할만 하네” 라고

내편을 들어줄때가 있는데,

그땐 진짜 아, 이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다. 

그치? 진짜 그렇지? 당신이 생각해도 이건 아니지?” 

나는 목소리가 커지고 의기양양해진다.

그 "이상한 사람"에게 가졌던 서운함이나 화는 온데간데 없다.

남편이 그 "이상한 사람"을 잡아온 것도 아니고,

그저 입으로 "동의" 하나 해준것 뿐인데,

이렇게 세상을 다 가진 듯이 행복한게 정상은 아닌것 같지만,

나는 그렇다. 


오늘이 그런 날이다.

남들에게 얘기하기 조금 부끄러운 얘기더라도,

남편은 “남”이 아니므로 난 오늘도 꿋꿋하게 남편에게 얘기를 한다. 

얘기를 하고 나면 남편에게 또 한소리 듣겠구나 싶다가도,

그럼 당연히 당신이 더 낫지” 같은 

이성과 객관은 개나 줘버리는,

아무런 과학적 근거나 이유없는,

내 편들어주는 소리를 듣고 나면, 

'이 사람 참 제대로 된 사람이야' 라고 남편 칭찬으로 시작해서,

'아, 역시 내가 남편하나는 잘 골랐어'라고 자화자찬으로 끝내며,

속상한 마음 없이 푹 숙면을 취한다. 


에쿠니가오리의 <당신의 주말은 몇개입니까?>의 번역서를 보면

"단박에 좋아진다" 라는 표현이 자주 나와 눈여겨 본적이 있었는데,

바로 이럴때,

나도 남편이 "단박에 좋아진다."


열번에 한번이더라도,

여기서 내 "비빌언덕"은 남편뿐이니,

한번이 두번되고 두번이 세번되길 기도하며

열심히 계속 비벼야지. 

[마침]


#십년차부부

#부부생활

#댁의남편은안녕하십니까



Photo by Charlie Foster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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