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와이제이 Jul 12. 2015

목욕예찬

에쿠니 가오리가 쓴 어떤 글에서 보면, 그녀의 목욕예찬론이 나온다. 기억은 그다지 명확하지 않으나, 글을 쓰는 그녀의 직업상 새벽까지 작업을 하고, 아침에 남편을 출근시키고 난 후 늦은 아침이나 오후쯤, 욕조에 물을 가득 받아 조용히 즐기는 목욕에 대한 예찬이었다. 그 대목을 읽고, 이 아줌마 나랑 통하는 데가 있네 했다.


나 역시 뜬금없는 시간의 목욕을 무척이나 사랑한다. 이게 웬만큼 한가해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아니, 시간만 많다고 할 수 있는 일도 아니다. 사실 사전 준비도 필요하고 목욕 후 사후처리도 있어야 하는 따지고 보면 귀찮은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러한 귀찮음도 감수하고 난 적어도 한 달에 한번은, 내 시간을 나 혼자 다 컨트롤할 수 있던 시절 (결혼 전이라 칭하자)엔 일주일에 한번은 bath tub을 했다. 주로 학교 갈일이 없는 날, 햇살이 밝은 늦은 오전 시간이나, 하루의 한중간인 이른 오후 시간이 목욕하기에 참 좋은 시간이다.


예전에 혼자 살던 집에는 욕실에 창문이 있어서 더 좋았다 (사실 많은 안 좋은 점을 뒤로 하고 그 아파트를 렌트하려고 마음먹은 두 가지 이유 중의  하나이기도했다). 욕조에 물을 받아놓으면, 창문 가득히 들어오는 햇살이 욕조에 받아놓은 물 위에 일렁였다. 물속에 들어가서 머리끝까지 물에 잠겼다가 수면 밖으로 나오면, 내 머리칼은 물과 햇살에 흠뻑 젖어있었는데, 그 햇살이 참 눈부시면서도 따스했다. 그래서 여러 번 그렇게 머리끝까지 들어갔다 나왔다가를 반복하곤 했다. 불규칙적인 바깥세상의 소음도 싱그럽고, 창으로 스며드는 알 수 없는 향기도 좋았다. 언젠가, 창문 밖이 온통 하얀 눈으로 뒤덮여 있는 한겨울의 목욕도 참 매력 있다. 운이 좋으면 동전 만한 함박눈을 목욕하는 내내 감상할 수도 있었다. 창이 있는 터라, 욕실 불을 꺼도 깜깜하게 어둡지 않아서, 때로는 불을 끄고 욕조에 있기도 했다. 딱히 목욕이래야, 물속에 잠겼다 나왔다를 반복하는 게 다인데, 그러다가 물이 식어 차가워지면 다시 따뜻한 물을 채워 넣고,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 나오곤 했다. 


지금 사는 집은, 보통 집들이 그렇듯이 창문이 없는 욕실이라 아쉽지만, 한적한 시간에 즐기는 목욕은 여전히 나에겐 작은 즐거움이자 힐링 방법이기도 하다. 욕조에 들어가서는 출렁이는 물결을 보며 이 생각 저 생각 끝도 없이 넘나들기도 하고, 때로는 머리를 비우기도 하고, 좀 우습지만 노래 몇 곡을 계속해서 부르기도 하고, 가끔은 깜빡 잠들기도 한다. 대개는 목욕 후엔, 몸이 좀 가벼워지는 느낌이 드는데, 그 기분 또한 좋다. 피곤한 날엔 그러고 나서 잠깐 낮잠을 자기도 하지만, 낮잠 후에도 기분은 역시 나쁘지 않다.


그냥, 왜 이런 목욕 얘길 갑자기 하냐면, 요즘에는 내가 이렇게도 좋아하는 목욕을 할 시간이 전혀 나지 않기 때문이다. 안다, 애 둘 키우면서 욕조에 물 받아하는 목욕을  그리워한다는  것부터가 제정신 아니라는 것. 하루에 한번씩 빛의 속도로 샤워하기도 쉽지가 않다. 목욕 중에도 둘째가 앙앙 우는 소리가 환청처럼 들려, 몇 번이나 샤워기를 끄고 귀를 쫑긋 세워보기도 하고, 실제로 우는 거라면 마음이 급해서 2배속, 아니 10배속으로 샤워를 한다. 그것도 아니면, 첫째가 수시로 욕실에 들어와 샤워부스 문을 열어제끼고 말을 거니, hot tub은 그야말로 언감생심이다. 둘 다 재우고 밤에 하면 되지 않느냐고, 아마 피곤에 지칠 대로 지친 몸을 욕조에 눕혔다간 잠들어서 익사하지 않을까 걱정된다.


그리하여 지금 나에게 무슨 소원이 있냐고 한다면, 햇살 좋은 낮 2시, 딱 한시간만 욕조에 물 가득 받아놓고 목욕하도록 해달라는 것. 어떠한 환청과 방해도 없이 말이다. 목욕이, 이토록 귀한, 사치가 될 줄이야.

매거진의 이전글 어떤 오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