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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와이제이 Oct 02. 2020

생애주기곡선

고등학교 1학년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문학시간에 “생애주기곡선” 그리기라는 프로젝트를 했었다. 

태어났을때부터 죽을때 까지 나의 온 생애를 그래프로 그려서, 인생의 희노애락을 상상하고 꿈을 펼쳐보는 뭐 그런 과제였다. 안그래도 국영수 공부할게 많은 까칠한 여고생인 나는 시간 잡아먹는 과제하나 생겨서 심드렁하게 생각했었는데 ... 이게 막 빠져드는거라


태어나서 그때까지 살았던 기간은 기간은 "고작" 17년이니 지난건 쓸게 별로 없었고, 그시간 이후 부터는 책임안져도 되는 미래를 위해 상상의 나래를 마구 펼칠수 있었던 것이다. 고2부터 갑자기 전교1등을 도맡아 한다고 쓰든, 당시 최고로 인기 좋았던 남자가수와 첫눈에 반해 결혼을 한다고 쓰든, 그 누구도 시비걸 수 없으니까. 게다가 이제 막 학업이 부담되기 시작하는, 수업마치고도 밤 10시까지 야간자율학습을 해야하던 우리들에겐 땡땡이치기 딱 좋은 프로젝트였다. 자세한 내용은 기억나지 않지만, 열심히 재미있게 그리고 무모하게 즐거워했던 과제였고, 성적도 잘 받았던것 같다. 


몇년 전 친정에 갔더니, 아직도 다 정리해서 가져오지 못한 짐이 박스 몇개에 들어있었다. 이런걸 왜 버리지 않고 모아뒀는지 모를 것들이 가득했다. 차곡차곡 모아뒀던 편지들, 수업시간에 돌리던 쪽지들, 친구들과 돌려쓰던 일기장, 대학 강의 노트, 대학원 선후배에게 받아 책장 자리만 차지하고 있는 학위논문들.. 그 무질서한 세월의 흔적들을 재활용 박스에 분리수거 하던중, "고등학교 문학노트"도 발견했다. 


노트에 기록된 첫번째 과제는 “생애주기곡선”이었고, 첫장에는 조잡하나마 볼펜으로 생애곡선이 그려져 있었다. 이게 웬 삼국시대 유물이냐 싶어 하던일을 멈추고 들춰봤다. 



나의 인생은 그러니까, 태어나서부터 줄창 완만한 상향곡선이었다. 

초등학교 6학년쯤에 한번 피크를 찍은적이 있었는데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아마, 좋아하던 남자애라도 있었던 걸까. 여튼, 신생아시절부터 초등, 중, 고등, 대학을 상향곡선을 그리다가, 첫 정점은 “결혼” ! (와우, 그땐 결혼이 인생 최고의 정점인줄 알았겠지), 그 다음 정점은 “아이”! (아이가 인생 두번째 정점이라고 생각했다니). 뭐 그렇게 커리어와 행복한 가정을 필두로 한참을 상위권에서 머물다가 서서히 저물어서 인생끝으로 가는 포물선. 당시 사회, 교육적 환경이 주입시켰던 행복한 인간상을 그대로 반영한 매우 판에 박힌 작품인것 같아 씁쓸했다. 그렇지만, 여고 1학년생이 뭐 또 얼마나 대단한 인생의 정점을 생각했겠으며, 1990년대 교육환경하에서 얼마나 일탈을 꿈꿀수 있었겠는가 싶으면 이해가 가기도 한다. 그리고 난, 그저 모범생이었다. 


한장씩 들춰가면서 각 시기별로 상상의 나래를 펼친 당시의 미래, 그러니까 지금으로서는 이미 과거가 되었거나 또는 현재인 이벤트들을 읽어나가는데 기분이 참 묘했다.  


우선 고3 마치고 무사히 농구선수 이상민오빠가 다니던 "대학에 진학" 부분에서 20살의 나는 살짝 인생의 피크를 맞이했다고 적혀있다. 이건 틀렸구만. 고3 마치고 재수생으로 신분을 탈바꿈하면서 길지 않은 인생 최초의 격한 좌절을 맞이했었다. 그건 뭐 그렇다 치고. 


그런데 읽다보니, 고 1의 내가 상상했던 나는 지금의 나와 닮아있다. 나는 대학을 졸업하고 유학을 간다. 왜 뜬금없이 독일로 유학을 간건지 모르겠다. 난 독어를 좋아하지도 않았는데 왜 독문과를 간건지도 모르겠다. 그저 영어말고 유일하게 아는 언어가 독일어인 관계로, 미국 말고 조금 더 이국적인 곳으로 유학을 가고 싶었던 속내가 아닐까 싶다. 독일어 전공도도 아니고 독일도 아니지만, 난 유학을 정말 떠나왔다. 


그 다음을 보자. 유학을 가서 학위를 받고 거기서 결혼도 한다. 와우

결혼을 하고 딸 쌍둥이를 낳는다는데, 와우 쌍둥이는 아니지만 36개월 차이로 딸이 둘 맞다. 


여기서부터 괴리가 시작되는데,

독일에서 교수로, 연구자로, 교육자로 살아가다가 ... [땡! 틀렸다. 한때는 연구자였고 교육자였지만 교수는 아니었고 강사였으며, 그마저도 지금은 아니다.] 

이후 한국으로 귀국해서 귀국기념 출판회를 연다. [푸힛! 귀국기념 전시회나 연주회도 아니고 출판회라니. 대체 무슨책을 냈길래, 북토크도 아니고 출판회라는 행사가 있긴 한걸까. 국정교과서 같은걸 썼나.] 

은퇴이후에도 후학양성과 집필에 매진하는, 우아하고 아름답게 잘먹고 잘사는 할머니가 된다는 썰 아닌 썰. 


신기했다. 이 과제의 힘이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나도 모르게 내 안에서 꿈꾸던 어떤 미래가 나를 여기까지 끌어온게 아닌가 싶었다. 여기서 결혼하고 딸 둘 낳은건 진짜 돗자리 깔 수준이었다. 이정도면 독일어 전공이 아니라 사주팔자나 토정비결을 배웠어야 했을까. 

 

하지만 씁쓸하기도 했다. 거기까지 잘 맞아가던 이야기가 조각났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조각난 시절이 바로 내가 지금 살고 있는 현재이기 때문이다. 난 대학교수가 아니다. 한때 열심히 되려고 한적이 있었지만, 되지 못했고 그 이후로는 되고 싶은 마음도 없어졌다. 연구자나 교육자는 오랫동안 내가 추구하며 끌어온 내 미래였지만, 결국 내 인생에 포함시키지 못했다. 여러가지 일들도 지치고 고생했어서 그런지 이젠 별로 뒤돌아보고 싶지도 않다. 


그래도, 희망은 있다. 학자로서 연구자로서 교육자로서의 성공은 아니겠지만, 언젠가 은퇴후 출판기념회가 아니라 귀국기념 북토크정도 한번 할수 있지 않을까. 직업도 없으니 은퇴가 언제일지 모르겠지만, 언젠가는 그런 미래도 어렴풋이 그려볼수 있지 않을까. 



과제 마지막 페이지를 복잡한 감정으로 덮었다. 중요한건, 아직 이 과제는 끝이 나지 않았다. 

열일곱살에 꿈꾸었던 마흔넷은 지금의 나와 닮기도 했고 다르기도 하다. 그 주기곡선의 끝이 뭐 한 80세쯤으로 끝나는데, 그 시대와 지금은 또 다르니까, 일단 끝을 한 15년 이상 늘여놓고 나니, 아휴 아직 갈 길이 멀었다

이제부터 뭔가 다시 시작해도 시간없어서 못했단 소리는 못하겠다. 


대학에 가고 대학원에 가고 유학을 가고 대학교수가 되다는 아름다운 모범답안의 끄트머리쯤에서, 하루하루 예측불가능한 오답을 쓰고 있는 기분이 들지만, 인생은 끝까지 가봐야 하는거니까. 내가 그 끝까지 가서, 모법답안말고도 답이 여러개 있다는걸 보여줘야지. 


지금 다시 그때로 돌아가서 생애주기곡선을 그린다면, 난 꽤 다른 그림을 그리게 될것 같다. 남들 다가는 길이 아닌, 그런 길. 과제 A받지 않아도 되니까 좀 다른길 말이다. 


문학노트는 친정에 그대로 두고 왔다. 

이젠 지금을 살아야 하니까. 




커버이미지 by Isaac Smith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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