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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와이제이 Oct 07. 2020

오분간

아이들이 오랜만에 옛날에 살던집 근처에 있는 놀이터에 가자고 한다. 특별할 것도 없는 놀이터이지만, 아이들에게도 "오래된" 것은 추억으로 남는가 보다. 가끔 다섯살 아이가 "엄마 내가 어렸을때 있잖아, 내가 3살일때 말이야" 라고 말하면 너무 귀엽기도 하고 우습기도 한데, 딴에는 살아온 인생의 절반쯤 되었을때의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니 내가 가끔 스무살무렵을 떠올리는 것과 비슷하다면 비슷한 일이다.


옛날집이라고 해봐야 8개월전까지 살던 집이지만, 그래도 지금 살지 않는 집은 옛날집이 맞다. 동네 어귀를 운전해서 들어오는데, 눈에 익은 나무와 길 모퉁이 비슷비슷하지만 한눈에 알아볼수 있는 지붕을 눈에 담으니 마음이 놓인다. 산책로를 따라 집 뒤편으로 걸어보니 새 집주인의 취향이 꽤 남달라 우리가 살던 집과는 여러모로 달라졌음을 알수 있었다. 기분이 이상하기도 하고, 또 안심되기도 했다. 이제 우리집이 아니니까 예전 우리집과 똑같은 모습으로 그곳을 지키고 있으면, 떠나버린 우리만 미안한 마음이 들었을것 같았다. 이제 다른 사람의 집이고, 난 가끔이지만 옛날 생각이 날때 오분정도 운전을 해서 올수 있는 곳에 추억을 묻어뒀으니 그것으로 되었다.


아이들은 산책을 마치자마자 놀이터로 그야말로 쏟아졌다. 세월이 하수상하여 학교도 못가고 놀이터 이용도 마음놓고 하기에 뭔가 깨림칙했는데, 여느 놀이터와 다를바 없는 놀이터이지만 옛날 우리집 근처의 놀이터는 아이들에게도 안심을 하게 만드나 보다. 다행히 동네 아이들이 하나도 없어서 그야말로 커다란 놀이터 전체를 두 아이가 다 차지하고 마스크도 없이 신나게 놀았다. 지난주에 갑자기 추워져서 얇은 패딩을 입혀 왔는데 뛰어 놀다보니 더워지는 모양이다. 옷을 다 벗어놓고 이리 저리 뛰어가며 놀고, 나는 만들어온 차를 마시면서 벤치에 앉아서 이런저런 풍경을 둘러봤다.


아 이 놀이터.


12월 1월생이었던 두 아이가 아마 놀이터 구경을 처음으로 한건 백일이었던 봄도 지나고 여름무렵이었던것 같다. 아기바구니를 유모차에 싣고 산책길을 한바퀴 돌다가 놀이터에 와서 잠깐 앉았다 가곤 했다. 앉고 기고 서고 할때마다 조심조심 아기용 그네도 태워보고, 낮은 미끄럼틀도 안고 탔다. 아기가 너무 작아서 어린 아이들용 스윙셋도 얼마나 커 보였는지 모른다.


아이들이 놀이터에 가면 그냥 혼자 놀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꽤 오랫동안 놀이터에 가면 나도 함께 놀아야 했다. 미끄럼틀 올라갈때 뒤에서 받쳐주고, 그네에 올려주고, 그네를 밀어주고, 매달리기 할때 옆에서 올려주고, 수십번은 부르는 "엄마" 소리에 자리에 앉을 틈은 아예 없었다. 눈으로는 아이들이 어디있는지 쫓느라 바쁘고, 잠깐이라도 눈에서 멀어지면 우는 소리가 들렸다. 넘어지는건 수도 없었고.


애들은 자기가 혼자 할수 있는, 그러니까 정복한 놀이기구에는 곧 흥미를 잃는가보다. 자꾸 더 어려운, 더 높은, 더 힘든 것들을 하려고 했고 그래서 매 순간 엄마는 필요했다. 작은 놀이터에서 살살 놀았으면 좋겠지만, 큰 놀이터로 자꾸 넒은 세상으로 가고 싶은게 아마 사람들의 습성인것 같기도 했다. 큰애가 제법 혼자 놀수 있는게 많아지자, 이제 둘째 차례였다. 여전히 자리에 앉아서 아이들을 바라볼 시간은 오지 않았다. 큰애는 계속 "엄마 나좀봐" 하며 나를 부르고, 작은애는 "나좀 도와줘"하며 나를 불러댔다.


오늘은 벤치에 가만히 앉아 있는데, 아이들이 날 부르지 않는다. 그렇다 하더라도 다섯살 둘째가 "엄마  나좀봐”라며 몇년전 언니가 하던 말을 신기하게도 똑같이 하면서 나를 찾지만, 내가 할 일은 확실히 많이 줄었다. 매달리고 미끄럼타다가 심심해질쯤 되면 그네를 밀어달라고 부탁할 정도였는데, 그마저도 혼자 그네타는 법을 터득하고 있었다.


와 이렇게 편할수가. 놀이터에서 차도 마시고 책도 읽고 이럴수 있는 시간이 드디어 온거구나. 하면서 아이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는데, 오래된 영화처럼 그 놀이터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울고 놀고 넘어지던 나의 작았던 아이들과 또 바빳던 내 모습이 보이는것 같았다. 양손으로도 안아 올릴수 있었던 작은 아이들, 머리를 하나로 질끈 묶고 화장기 없는 얼굴로 연신 뛰어다니며 애들을 챙기도 나, 안지도 서지도 못하던 아이들, 엉금엉금 놀이터 바닥을 기어다니던 애들, 처음 그네를 타던날, 미끄럼틀 타고 나서 울던 아이 ... 그리고 아마 저 멀리서 매달리기를 두칸에 하나씩 식은죽 먹기로 해내는 8살과 언니를 쫓아서 신나게 뛰어다니는 5살. 애들이 깔깔 웃는 소리, 멀리서 들려오는것 같은 엄마 부르는 소리.


하마터면 놀이터에 앉아서 훌쩍 거릴뻔 했다. 훌쩍 거리는 대신 큰 숨을 한번 내쉬고, 아 애썻다, 나. 그간 수고 많았다 진짜, 라고 나에게 말해줬다. 그곳에 앉아있으며 열살이 되고 열다섯, 스무살이 되어가는 아이들 모습까지 보일것만 같았다. 들고 있던 차 한잔을 마저 입속에 털어넣고, 기분좋은 따스함이 내 입안과 목을 지나 몸속을 데우면, 내 다섯살 여덟살 아이들이 스무살이 되어버릴것 같았다.


이렇게 시간은 생각보다 빨리 흐르고

우리는 흘러버린 시간을 기억속에 붙잡고 살게 되겠구나 생각했다.

그저 끄적이는 산문이라면 몰라도 "시"를 쓰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는데

내가 처음 읽고 가슴이 턱 막혔던 나희덕 시인의 '오분간'이라는 시가 떠올랐다.

그래, 시는 이렇게 떠올라야 하는 거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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