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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와이제이 Oct 14. 2020

너의 상상친구

아이가 갓 세살이 되었을 즈음이었다. 


바닥에 엎드려 누워 소파 아래를 들여다 보며 중얼거리는 아이의 소리를 들었다. 

뭘 하나 싶어서 귀를 귀울여보았더니 누군가와 이야기를 하는 모양새다. 


"나는 딸기를 좋아해. 너는?" 

"아이스크림 많이 먹으면 배가 아야해." 

"엄마가 제일 좋아." 


뭐 이런 얘기들이었다. 


얼마후에는 창문앞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서 한쪽 팔로 고개를 받치고 또 누군가와 이야기를 한다. 

들릴듯 말듯 조용히 속삭이는 소리는 내가 불러주던 자장가였다. 


"누구에게 자장가를 불러주는 거야?" 물었더니 

"응 내 친구" 라고 말한다. 

아, 이게 육아서에서만 들어보던 imaginary friend라는 거구나, 신기했다. 


아이에게 맞춰주려고 "친구가 저기 앉아있네?" 했더니 

"아니야, 저기 누워서 코코 자고 있잖아" 라고 대답한다.

아무렇지도 않게 창을 바라보며 태연스럽게 이야기를 하는데, 이쯤되니 조금 무섭기도 했다. 

괜찮은 거 맞아? 책에서 원래 이런거랬어, 이상한거 아니랬어. 


"음, 저 친구 이름도 알아?" 물었다. 

Imaginary friend를 미국 육아서에서 봤던 탓일까? 미국 의사선생님께 들은 탓일까? 

아이의 상상친구 이름은 샬럿이나 소피아 정도를 기대했는데, 


"쟤 이름은 ... 행구!" 


하하하하 ... 정말 빵 터져서 깔깔댔더니,

친구가 잠들려다가 깨버리면 어떻하냐고 아이는 핀잔을 줬다. 


그냥 아무이름이나 둘러댄게 아닐까 싶어서, 다음날 그리고 며칠후 다시 물어봐도

여전히 우리 딸애의 imaginary friend 이름은 토속적인 느낌이 강한 “행구” 였다. 

할아버지댁에서 키우던 개 이름이 “멍구” 여서 거기서 나온건가 싶기도 했지만,

여전히 오리무중, 그 근원을 알수 없는 이름이었다. 


여하튼, 내 세살 딸아이의 imaginary friend (행구)와 아이는 꽤 오랫동안 잘 지냈다.   

행구의 정체가 의심쩍고 궁금하던 엄마는 집요하게 행구에 대해 캐물었다. 

어떻게 생긴녀석인지, 남자인지 여자인지, 궁금해서 그림을 그려보자고 했더니

매번 그려오는 그림이 일관성있게 비슷하기는 했다. 


사람처럼 얼굴과 눈코입이 있긴 한데, 성별과 나이는 미상. 

사람인것 같기도 하고 동물인것 같기도 한 행구. 


데이케어 선생님에게도 어느날 행구의 존재를 알렸다. 

선생님이 아이가 imaginary friend 가 있는것 같다고 하시길래

이름을 "Haengu" 라고 알려줄까 말까 한참 고민했었다. 


그렇게 한 3-4 개월정도 정체불명의 행구는 우리 아이의 둘도 없는 친구였다. 

함께 낮잠도 자고, 간식도 먹고, 가끔 어제 엄마한테 혼났다며 고자질도 하고,

레고를 하고 혼자 놀길래 행구는 어디갔냐고 물었더니 행구가 오늘 피곤해서 쉰다고. 

제법 구체적이고 실체가 있는 듯한 내 아이의 이매지너리 프렌드는 아이와 함께 자라고 있었다. 


그로부터 3년쯤 후인가, 서랍에서 우연히 발견한 행구 그림을 아이에게 보여주며

"너 얘 기억나? 니 친구? " 했더니

전혀 기억이 없으시단다. 

의젓한 초등학생이 되었으니 코찔찔한 시절의 친구는 잊고 싶을수도. 

"얘 이름이 행구잖아, 행구!" 

"행구? 이상한 이름이네" 라고 말한다. 

그러게 말이다. 정말 이상한 이름이야.


그렇게 행구는 아이의 deep memory 로 밀려난 모양이다. 

그러다가 영화 Inside Out의 빙봉처럼, 영원히 잊혀지겠구나 싶어서, 

행구 그림 한장은 버리지 않고 영원히 간직하기로 했다. 

기억안난다는 애한테, 

얘는 행구고 너랑 만 세살에 제일 친한 친구였다고 두번 세번 강조했다. 




어제 일기를 쓰려다 갑자기 몇년 전 딸의 imaginary friend 가 떠올랐다.  

빨간색 내 일기장이, 나에게는 imaginary friend 인것 같았기 때문이다.

좋은날, 슬픈날, 아픈날, 신나는날 .. 하루의 마지막에 아무말 없이내 얘기를 들어주는 친구다.

글로쓰는 대신 때로는 일기장에 대고 그냥 중얼중얼 이야기를 하고 싶지만, 

12살 이후까지도 imaginary friend가 있다고 믿으면 병원에 가서 진료를 받으라는 글을 읽고나니,

혹시나 그랬다가는 병원에 끌려갈수도 있으니 그러지는 않는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중얼 거리는 대신 나는 또박또박 하루를 뒤돌아보고 반추하며, 

화도 내고, 감사도 하고, 위로도 받고, 감정정리도 하니 - 게다가 그 친구는 뒤끝도 없으니,

나에게 이보다 좋은 친구가 어디있나 싶기도 하다. 


당연히, 오늘부터 내 일기장 이름은 "행구"다 . 





커버이미지 by www Hey Beauti com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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