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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와이제이 Oct 08. 2020

자기만의 방

A room of one's own 

이 집으로 이사를 오겠다고 마음을 먹은건, 바로 이 방 때문이었다. 


주방과 팬트리를 지나 걸어오면 오른편에 있는 방. 네모 반듯한 방이 아니라 가로로 긴 직사각형 모양의 방이며 방문과 마주보는 벽에는 작지 않은 창이 있다. 창문 바로 앞에는 혼자 쓰기에 불편함이 없는 책상을 붙여두어, 의자에 앉으면 시선은 자연스럽게 창밖을 향한다. 예전 집에서 주방에 두고 그릇장으로 쓰던 가구를 한쪽 벽에 붙여 책장으로 쓰는데, 이 방과 꽤 잘 어울리는것 같다. 쓰고 보니 그냥 작은 방이다. 그런데 왜 그렇게 이 방에 집착했을까. 


내 방을 다시 찾고 싶었다. 



열살 무렵부터 나는 혼자 방을 썼다. 

부모님집에 함께 사는 동안 "내" 방이 있었고, 유학을 와서는 방 뿐이 아니라 나 혼자 집을 썼다. 결혼을 하고 나서는 아래층에 남편과 나란히 책상을 두고 일을 했다. 문을 꼭 닫고 들어갈수 있는 내 방 대신, 책상과 의자 하나가 그 몫을 대신했다. 아이들이 태어나고 아이들 물건이 집을 조금씩 잠식해가면서 내 공간은 반대로 입지를 줄여갔다. 아래층에 여전히 책상과 의자하나가 있었지만, 그 의자에 앉을 시간은 별로 없었다. 저긴 내 책상과 의자야! 라고 고집스러운 표정으로 양보하기 싫어하던 어린시절의 나를 보는듯 씁쓸했지만, 결국 그 책상과 의자는 무용지물이 되어갔다. 할일이 있으면 간단히 태블릿을 들고 주방에 서서 하거나, 잠깐 짬이 나면 식탁에 앉아서 일을 했다. 아래층에 내려가 컴퓨터를 켜고 "제대로" 일할 엄두는 내지도 못했다. 


그렇게 어느순간 고스란히 사라져버린 내 방을, 다시 찾고 싶었다. 

남편은 서재에, 아이들은 각자 방에 들어갈때, 나도 내 책상이 있는 내 방에 들어가고 싶었다. 내 방은 주방도 아니고, 식탁도 아니고, 거실도 아니었지만, 난 그곳들이 내 방이라고 생각하며 지내온것 같아 조금 억울했다. 나도 내 공간 하나정도 가질 자격은 되잖아? 


해서, 이 집이 맘에 들었다. 

보통 집 정면에 서재를 둔 주택들이 이곳에서는 흔한데, 그런 "제대로된" 서재는 부담스럽거나, 집 앞을 걸어다니는 사람과 차들이 눈에 자주 보여 매력이 없었다. 햇볕이 짱하게 하루종일 들어오는 방에서는, 잠시라면 몰라도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고 오랫동안 책을 읽기는 힘들었다. 조금 숨어있는 듯, 뒤켠에 있는 작은방. 아무런 특별할 것 없는 여느 방, 그러나 나에게만은 어린시절 처음 방을 갖게 되었을때 처럼 신비스럽고 아늑한 방이었다. 




사실, 보통 이렇게 주방 옆에 딸린 방을 리소스룸 (Resource Room) 이라고 부른다는 것을 집 도면을 보고 알았다. 어떤 집은 주방 한켠에 캐비넷과 맞춘 책상하나가 이 방을 대신하기도 하고, 이렇게 따로 방이 있기도 하다.  리소스룸이라 함은, 결국 이런저런 목적으로 마음대로 사용할수 있다는 얘기다. 어떤 집은 아이들 방과후 숙제하는 방으로 사용하고, 아는 집은 크래프트룸으로 꾸며서 페인팅, 크래프트, 재봉틀까지 두고 사용한다. 또 어떤 집은 부족한 팬트리를 더 넓게 사용하기 위해 선반을 넓게 짜 넣거나, 겨울옷이나 신발을 정리해두는 창고로 쓰기도 한다. 이 방의 정확한 위치는 차고에서 실내로 들어와 신발을 벗는 머드룸과 간단히 세면대와 변기만 있는 파우더룸, 그리고 주방으로 가는 삼거리에 있으니, 온갖 정신없고 복잡하고 정리 안된 것들 사이에 있는게 맞다. 


안타깝지만, 내 방도 결국 대 낮에는 리소스룸이 맞다. 

배달온 소포를 열 커터칼이 여기에 있으니 모든 소포는 이 방에서 열고 포장재는 여기서 바로 재활용박스로 토스. 배달온 우편물은 우선 여기서 추려서 버릴건 버리고 필요한건 가지고 들어가기. 우표도 여기에 있으니 보내야할 우편물도 일단 이방에서 취합. 장보고 와서 던져놓은 영수증, 아이들이 숙제로 풀어온 문제집, 전화기며 태블릿, 랩탑 충전기들이 다 이방 출신이다. 그러고 보면 이 방은 집 안과 집 밖의 어중간한 사이에서 역할을 해내고 있다. 


스케치





가족들이 깨어 있을때에는 그런 정신없는 방이다가, 방주인이 혼자 찾아오는 이른 아침이나 밤시간에는 드디어 "내 방"으로 돌아온다. 아이들과 굿나잇 인사를 하고 내려와, 현관에 아무렇게나 벗어던져둔 신발을 정리하고 내 방에 들어서서 불을 탁 켜면, 그때부터 이 방은 "내 방"이 된다. 


책상 옆에 의자를 하나 더 뒀는데 생각보다 유용하게 쓰인다. 엄마를 찾아와 부탁할 거리가 있는 아이들은 그 의자에 앉아서 기다리고, 커피한잔 들고 말동무할 사람을 찾아 이방으로 오는 남편도 그 의자에 앉아서 이야기 한다. 가끔 책상에 내가 앉아있고 그 모퉁이 의자에 남편이 앉아서 깊은 밤까지 얘길 하기도 하는데, 속상하거나 답답했던 일들도 스스럼없이 얘기하게 된다. 그렇게 앉아 있으면 역시 이 방 주인은 나고, 의자에 앉아서 이야기하는 남편은 손님같아 기분이 묘하다. 그 의자에 앉아서 위로도 칭찬도 나누고, 또 함께 무언가 결정하거나 마음먹기도 하는데, 침대에 누워서 얘기하거나 주방을 서성이며 하는 얘기와는 좀 다른 기분이 들기도 한다. 


하루 사이사이에도 짬이나거나 혹은 힘이 들때, 머리가 복잡하거나 속상할때 나는 슬며시 방에 찾아든다. 

대개 방에 들어와서 제일 먼저 하는 일이, 창틀에 올려둔 핸드크림을 조금 짜내는 일이다. 주방에서 손에 물을 묻히는 일을 마치고 들어오게되는 일이 많아서일까. 마치 의례인것마냥 핸드크림을 손에 바르면서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들을 잠시 멍하니 바라본다. 좋아하는 향기가 손에서 코로 전해지면서 맑은날, 흐린날, 비오는날, 눈오는날을 바라보는 건, 나에게 짧지만 효과가 좋은 마음챙김이다. 그러면서 무심결에, 오늘은 날씨가 춥네, 하늘이 예쁘네, 따뜻하게 입어야겠네 라고 하는 말들이, 나에겐 하루의 다짐이고 하루의 반성이고 하루의 일기다. 


그렇게 이 방에서 일기도 쓰고, 이렇게 브런치에 부끄럽지만 글도 쓰고, 책도 읽고, 손글씨로 시도 옮긴다. 가끔 그림도 그리고, 그도 아니면 노트를 꺼내어 낙서를 하기도 한다. 무엇을 해도 좋고,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좋은 그런 곳이다. 당장 저녁 메뉴를 머리에서 생각해보기도 하고, 나의 십년후를 상상해보는것도 괜찮은 그런 곳이다. 무언가 다정한 것들을 떠올리고 미소를 지어도 되고, 속상할땐 머리를 뭍고 좀 훌쩍여도 되는 그런 곳이다. 버지니아울프가 말했던 자기만의 방은 찾았으니, 이제 500파운드를 만들어볼까. 



이제 정말, 내 방을 다시 찾았다. 





커버이미지 by Dillon Shook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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