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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와이제이 Oct 06. 2020

영하 25도와 중고차

나는 일년의 절반정도가 겨울인 곳에 산다. 


첫눈은 10월중순에서 말경에 내리고 4월까지 눈 내리는건 매우 일반적이다. 좀 많이 춥다 할때는 화씨와 섭씨가 만나는 영하 40도 인적도 가끔이지만 있었다. 한해 평균 눈과 추위로 인해 학교 쉬는날이 약 7일정도는 되고, 이에 따라서 여름방학날짜가 변경되기도 한다. 그래도 웬만큼 추워서는 학교는 쉬지 않고, 초등학교 아이들은 영하 10도정도는 아무렇지도 않게 쉬는시간에 밖에서 뛰어논다. 


오늘이 10월 6일, 그러니까 아마 몇주 안에 첫눈이 내릴지도 모른다. 첫눈은 아니더라도 10월 마지막날 할로윈에 이동네 아이들은 너무 추워서, 애써 차려입은 코스튬이 두툼한 겨울자켓안으로 다 가려진다. 그래서 코스튬을 입은건지 안입은건지 잘 분간이 안되니 안타깝다. 이나라 어디에 가든, 누구를 만나든, 이곳에 산다고 하면, 와! 거기 정말 춥다며. 거기서 어떻게 지내니, 그런 소리만 듣는다. 




기말고사 페이퍼 작업을 하던 중이었던것 같다. 그러니까 아마도 크리스마스 전주쯤 이었나보다. 보통의 공부하기 싫은 학생들이 그러듯, 집에서는 일이 안된다며 굳이 당시 무거운 노트북을 챙겨서 집 근처 커피숍으로 나왔다. 유학 2년차에 부모님에게 손벌리지 않는 범위안에서 10년정도된 중고차를 샀는데, 운전석 창문이 고장나서 올리지도 내리지도 못한다는 것과 워낙 연식이 오래되었다보니 차문을 둘러싼 고무패킹이 헐거워져서 문을 꼭 닫아도 바람이 샌다는것 뭐 그것 빼고는 큰 문제가 없었다. 


집에서 걸으면 한 삼십분 거리에 있는 커피숍이었지만, 바깥은 영하 25도정도 되었고 큰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건너야 했으므로 차로 움직였다. 커피숍에서 몇시간 일을 하다가 차에 두고 내린 책을 꺼내러 잠깐 주차장으로 갔다. 열쇠구멍에 키를 넣고 돌리는데 돌아가지가 않는다. 추워도 너무 추운 날씨에 오래된 고물차 (여기서부터는 고물차라고 하자, 신경질나니까) 라 그런지 열쇠구멍까지 꽁꽁 얼어붙은것 같았다. 손에 들고 있던 미직지근한 커피잔을 열쇠구멍근처에 대고 좀 녹여보지만, 그런다고 녹을리가 없다. 오히려 커피가 급냉으로 식어버렸다. 따뜻한 커피를 열쇠구멍에 졸졸 흘려보내면 열쇠구멍이 녹지 않을까 잠깐 생각했지만, 실수로 쏟아진 커피가 차문에 들러붙자마자 고드름이 되는걸 보고 기겁했다. 


일단 너무 추운관계로 다시 커피숍안으로 들어왔다. 이제 공부고 페이퍼고 머릿속에서 다 날라갔고, 차문을 어떻게 하면 열고 무사히 집으로 복귀할수 있을까만이 홀홀단신 유학생의 생존을 위한 과제였다. 이 날씨에 차를 버리고 삽십분 거리를 걷다간 꽁꽁 얼어서 동사할테고, 커피숍은 이제 30분 후면 문 닫을 시간이다. 핸드폰을 만지작 거리는데, 핸드폰 배터리마저 간당간당하다. 한 5프로 정도 남았나. 이 동네 통털어 외우고 있는 전화번호라고는 내 번호밖에 없는데, 정말 전화기마저 방전되고 나면 난 어느 누구의 연락처도 모르는채, 커피숍이 문닫음과 동시에, 바깥으로 쫓겨나서 열리지 않는 차옆에 서있게 될 (그러다가 죽을지도 모르는) 신세였다. (참고로, 우버 이런거 없던 시절이고요, 택시는 예약제로만 운영되는 도시에 살고 있었습니다.)


일단 침착할 필요가 있었다. 그새 배터리가 4프로로 줄어든 전화기 속에서 나를 살려줄만한 사람들을 훑어나갔다. 이미 방학이 시작된 과도 있어서 한국이든 다른 지역으로 떠난 사람도 많은데, 최대한 그 커피숍 근처에 있거나, 차로 운전이 가능하거나, 토요알 밤이니 가능한한 식솔이 딸리지 않은 사람, 부탁하더라도 나중에 이상한 소문이 나지 않을 사람으로 찾아봤으나, 참 마땅히 부탁할 사람이 별로 없더라. 고민끝에 친한 언니 한명, 웬만큼 아는 오빠 한명 연락처를 노트에 적었다. 핸드폰이 사망하더라도 연락은 할수 있어야 하니까. 


먼저 친한 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받지 않는다. 

배터리는 3프로로 줄어들었고, "웬만큼 아는" 오빠차례였다. 전화를 걸었다. 받았다. 할렐루야. 

마음이 급해서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배터리가 남아있는 동안 내가 전화한 목적을 얘기해야 했다. 그러고보니 이 사람과 전화통화를 한게 처음인가 싶기도 했다. 아니, 말은 한적이 있었던가 싶기도 했다. 


뭐 어쨋든, 하나. 차 문이 열리지 않는다, 둘. 커피숍이 십분 안에 문을 닫는다, 셋. 십분안에 나를 데리러 올수 있는가, 넷. 커피숍위치는 어디다, 예의는 지켜야 하니 다섯. 죄송합니다. 이렇게 전해햐 하는 내용을 전하고 전화를 끊었다. 이미 손님은 한명도 없고 커피숍직원은 청소를 시작하길래, 가방을 챙겨 (옥외) 주차장으로 나갔다가 세차게 부는 바람에 문 안쪽에서 애타게 오셔야 할분을 기다렸다. 누군가를 그렇게 애타는 심정으로 기다린 적이 있었던가 싶었다. 설상가상, 진짜 설상가상으로 눈까지 내리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밤 9시, 영하 25도에 눈이 오고 바람이 부는데 내 차는 꽁꽁 얼어서 열쇠가 돌아가지 않는 상황. 


빈 주차장에 라이트가 비추고 “웬만큼 친한” 오빠의 차가 들어왔다. 너무 반갑고 서러웠다. 전화로 이야기 한 내용을 다시한번 쫘악 리플레이 하고나서, 차문이 열리지 않는다고 소리를 질러댔다. 조용조용하신데다가 힘이 세지도, 기술이 있지도 않아보이는 분이라 큰 기대없이, 나를 그저 무사히 집까지만 데려다 달라고 할 참이었다. 열쇠를 달라고 하기에 건냈다. 열쇠구멍에 넣고 재깍, 돌리는데 …. 열쇠가 돌아가고 문이 열리는 거라. 


맨 얼굴에 눈과 바람을 무방비로 맞으며 서 있던 나는 멍 해져서 말도 안나왔고, 얼떨결에 조심히 돌린 열쇠가 돌아가자 그분도 멍 해져서 가만히 서있었다. 대체 무슨 상황이었는지, 아마 내가 그 전에 문을 열려고 했던 갖가지 시도때문이었을까. 왜 이 문이 이제야 열리는지 울고 싶었다. 민망한데다가 + 미안한데다가 아주 엉망이었다. 문을 열고도 놀라신 그분은 어쩔줄 몰라 웃어 넘겼지만, 아니 그 분도 완전 이상하다고 생각하셨겠지.

 



문은 열렸고, 그 밤에 "많이"도 아니고 “웬만큼” 친한 오빠를 불러 이런 싱거운 일을 치뤘다는것에 대한 책임감으로 근처 식당에 가서 저녁을 사겠다고 했다. 그래서 토요일 밤 9시에 그렇고 그런 근처 타이음식점에 갔다. 식당에 들어가서 패딩을 벗으려다보니, 집에서 커피숍에 나올때 바지만 대충 갈아입고 위에는 잠옷이라고 해도 무방한 옷을 껴입고 왔음을 인지했다. 더운데 겉옷을 벗지도 못하고 밥을 코로 먹는지 입으로 먹는지 모르게 먹었다. 먹는 내내 공통적인 대화주제가 별로 없었던 두 사람은, 어떤 원리로 열쇠구멍이 막혔던건지, 그런데 왜 얼마후 더 추워진 날씨에도 불구하고 다시 열렸던 건지, 왜 핸드폰은 추운날씨에 방전이 빨리 되는지, 왜 그 두사람 전화번호만 적어뒀던건지, 토요일밤에 대체 그 친한언니는 왜 전화를 받지 않았던건지에 대해서 토론했다. 


식사를 마치고, 내 차문이 제대로 열리는지, 시동이 잘 걸리는지 확인한 후에, 다시 한번 감사의 인사를 전하며 헤어졌다. 어쨋든, 집에 무사히 도착했고, 엄동설한에 얼어죽을 고비를 한번 넘겼다. 




인생을 살면서 시트콤같은 일을 여러번 겪었던 나로서는, 이 또한 길지 않은 인생에 길이 길이 남을 에피소드겠거니 생각했는데, 그날 그일은  “웬만큼 친한” 오빠가 3개월후 "남친"이 되고, 2년후 "남편"이 되는 프롤로그였다. 난 억울하게도, 원래 “웬만큼 친한” 오빠를 마음에 두고 이 미스테리한 사건을 조작한게 아니냐는 누명까지 쓰게 되었는데, 그런 소리를 하도 듣다보니 이제와서는 뭐가 진실이었는지 나도 가물가물하다. 


나의 고물차는 그로부터 2년후 여름(?)에 팔아버렸고 

나와 “웬만큼 친한” 오빠는 올 겨울이면 결혼한지 십년째다. 

살면서 다투기도 많이 했고 뵈기싫을때도 많지만

엄동설한에 날 구해준 은인이다 생각하면 참지 못할 일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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