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 디자인으로 고민하는 동료에게-013
"10년을 일했는데, 이제 뭘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지난주 커피를 마시며 만난 선배 디자이너의 첫마디였습니다. 업계에서 인정받는 시니어 디자이너, 수많은 프로젝트를 성공시킨 베테랑. 그런 그가 갑자기 던진 말에 저는 할 말을 잃었습니다.
"권태기라고 하기엔 너무 무겁고, 번아웃이라고 하기엔 또 다른 느낌이에요. 그냥... 공허해요."
시니어 디자이너의 권태기는 주니어나 미들급과는 다릅니다. 실력이 부족해서도 아니고, 경험이 없어서도 아닙니다. 오히려 너무 많이 알아서, 너무 많이 봐서 생기는 고민입니다. "이제 뭐가 남았지?" 하는 근본적인 질문 앞에 서게 되는 시간.
오늘은 10년 이상 경력의 시니어 디자이너들이 겪는 특별한 권태기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합니다.
강민호는 12년차 브랜드 디자이너입니다. 대형 브랜딩 에이전시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누가 봐도 성공한 커리어를 가지고 있습니다. 국내 유명 브랜드들의 리브랜딩을 주도했고, 여러 디자인 어워드를 수상했습니다.
하지만 최근 그는 이상한 감정에 사로잡혔습니다.
"또 카페 브랜딩이네. 이번엔 어떤 컨셉으로 포장하지?"
클라이언트 미팅에서 돌아온 그는 책상에 앉아 멍하니 모니터를 바라봤습니다. 예전 같으면 벌써 스케치를 시작했을 텐데, 손이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할 수는 있습니다. 아니, 너무나 잘 할 수 있습니다. 그게 문제였습니다.
"미니멀하면서도 따뜻한 느낌, 내추럴하지만 세련된 감성, 로컬이지만 글로벌한 비전. 벌써 수십 번 해봤어. 결과물도 뻔해. 클라이언트가 좋아할 포인트도 알고, 어디서 수정 요청이 들어올지도 보여."
이것이 시니어의 저주입니다. 너무 많이 알아서 설레지 않는 것. 프로세스가 보이고, 결과가 예측되고, 반응까지 읽히는 순간, 창작은 작업이 됩니다.
그날 저녁, 민호는 후배 디자이너 수진과 함께 남았습니다. 수진이 작업 중인 프로젝트를 봐주기 위해서였습니다.
"디렉터님, 이 타이포 레이아웃 어떠세요?"
민호는 한눈에 문제점을 파악했습니다. 시각적 위계가 약하고, 여백 처리가 어색했습니다. 3분 만에 피드백을 마쳤습니다.
"이 부분 수정하고, 여기 간격 조정하면 될 것 같아."
수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수정에 들어갔고, 민호는 자리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문득 깨달았습니다.
"나는 언제부터 직접 만들지 않고 지시만 하게 됐을까?"
시니어가 되면 자연스럽게 리더의 역할을 맡게 됩니다. 후배들을 가르치고, 방향을 제시하고, 프로젝트를 관리합니다. 물론 중요한 일입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자신이 왜 디자이너가 되었는지, 그 순수한 창작의 기쁨을 잊어버리게 됩니다.
민호가 디자인을 시작한 이유는 무언가를 만드는 것 자체가 좋았기 때문입니다. 하얀 캔버스 위에 첫 선을 긋는 순간, 색을 입히는 과정, 타이포그래피가 자리를 잡아가는 순간의 짜릿함. 그런데 지금은?
회의, 피드백, 클라이언트 미팅, 일정 관리. 그의 하루는 디자인보다 매니지먼트로 채워져 있었습니다.
다음 날 아침, 팀 회의가 있었습니다. 막내 디자이너 준서가 새로운 AI 디자인 툴을 소개했습니다.
"이거 보세요! 프롬프트만 입력하면 5초 만에 로고 시안 10개가 나와요. 물론 수정은 필요하지만, 초기 아이디어 스케치로는 정말 유용해요."
팀원들이 신기해하며 화면을 들여다봤습니다. 민호도 관심 있게 봤지만, 내심 복잡한 감정이 들었습니다.
"AI가 5초 만에 만드는 걸 나는 12년 동안 연습해왔는데..."
점심시간, 같은 연차의 디자이너 친구 혜진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요즘 후배들 보면 어때? 나만 이런 건지 모르겠는데, 트렌드를 따라가기가 벅차더라."
혜진이 한숨을 쉬었습니다.
"나도 그래. 예전엔 내가 트렌드를 만들었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따라가기도 힘들어. 새로운 툴은 계속 나오고, 젊은 친구들은 그걸 너무 빨리 습득하고. 경력은 쌓이는데 왠지 뒤처지는 느낌?"
시니어 디자이너들이 겪는 또 다른 권태기는 바로 이것입니다. 기술의 변화 속도와 자신의 성장 속도 사이의 괴리. 10년 전에 배운 것들이 여전히 유효한지, 나의 경험이 아직도 가치가 있는지에 대한 의심.
한 달이 지났습니다. 민호는 여전히 같은 자리에서 같은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금요일 저녁, 또 하나의 프로젝트가 마무리됐습니다. 클라이언트는 만족했고, 팀원들은 수고했다며 서로를 격려했습니다.
하지만 민호는 기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10년을 더 하면 뭐가 달라질까? 똑같은 프로젝트를 반복하다 은퇴하는 건가?"
집으로 돌아가는 지하철 안에서 그는 자신의 포트폴리오를 다시 펼쳐봤습니다. 수많은 브랜드들, 화려한 결과물들. 하지만 그 안에서 자신의 이야기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모두 클라이언트의 요구를 맞춘 것들이었습니다.
"내가 정말 하고 싶은 디자인은 뭐지? 나만의 스타일은 있는 건가? 아니면 그저 클라이언트 요구사항을 완벽하게 실행하는 기계가 된 건가?"
다음 주 월요일, 민호는 대표에게 조심스럽게 제안했습니다.
"대표님, 제가 요즘 고민이 좀 있어서요. 6개월 정도 안식년을 가져도 될까요?"
대표가 놀란 표정으로 물었습니다.
"안식년? 무슨 일이야? 다른 곳으로 이직하려는 거야?"
"아니요. 그냥... 다시 정비할 시간이 필요해요. 12년 동안 쉬지 않고 달려왔더니 제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모르겠더라고요."
대표는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알겠어. 네가 그동안 회사에 기여한 것도 많고, 무엇보다 네가 번아웃 되는 것보단 잠시 쉬는 게 나을 것 같아. 한 가지 조건은, 꼭 돌아와야 해. 약속할 수 있어?"
민호는 감사 인사를 하며 자리를 나왔습니다.
안식년 첫 주, 민호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쉬었습니다. 늦잠을 자고, 낮에 산책을 하고, 오랜만에 책을 읽었습니다. 디자인과 관련 없는 책들이었습니다.
둘째 주, 그는 평소 가보고 싶었던 전시를 찾아다녔습니다. 디자인 전시뿐만 아니라 회화, 조각, 설치미술까지. 그리고 문득 깨달았습니다.
"나는 언제부터 디자인만 보게 됐지? 예전엔 모든 것에서 영감을 받았는데."
셋째 주, 그는 개인 프로젝트를 시작했습니다. 클라이언트도 없고, 마감도 없는 순수한 작업이었습니다. 주제는 "나의 언어 찾기". 12년 동안 클라이언트의 언어로만 말해왔으니, 이제는 자신의 언어를 찾아보기로 했습니다.
처음엔 막막했습니다. 자유가 주어지니 오히려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하지만 천천히, 손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의미 없어 보이는 낙서들, 즉흥적인 타이포그래피, 구조 없는 레이아웃. 그런데 이상하게도 재미있었습니다.
넷째 주, 그는 후배 디자이너들을 만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의 작업을 보고,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지시하는 게 아니라, 배우는 자세로 접근했습니다. 그리고 놀랐습니다. 후배들에게서 배울 것이 이렇게 많았다니.
"AI 툴, 새로운 트렌드, 다른 접근 방식. 이게 경쟁 상대가 아니라 동료였어. 내가 너무 방어적이었던 거야."
3개월이 지났을 때, 민호는 대표에게 연락했습니다.
"대표님, 복귀하고 싶어요. 그런데 제안이 하나 있어요."
그는 복귀 후 새로운 시스템을 제안했습니다.
1. 시니어 디자이너를 위한 '크리에이터 타임' 도입
매주 금요일 오후는 순수 창작 시간으로 정했습니다. 업무와 무관하게 자신이 하고 싶은 작업을 하는 시간. 처음엔 비효율적으로 보였지만, 이 시간이 오히려 실제 프로젝트에 신선한 아이디어를 제공했습니다.
2. '역멘토링' 시스템
시니어가 후배를 가르치는 것만이 아니라, 후배가 시니어에게 새로운 트렌드와 툴을 가르치는 시간을 만들었습니다. 서로에게 배우는 문화가 형성되자, 세대 간 장벽이 무너졌습니다.
3. 커리어 재설계 워크숍
매 분기마다 시니어 디자이너들끼리 모여 자신의 커리어를 재점검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나는 왜 이 일을 하는가?", "10년 후 나는 어디에 있고 싶은가?" 같은 근본적인 질문들을 던졌습니다.
4. 프로젝트 선택권
시니어에게는 프로젝트를 선택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습니다. 모든 프로젝트를 다 맡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의미를 찾을 수 있는 프로젝트에 집중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5. 사이드 프로젝트 지원
회사 업무 외에 개인 프로젝트를 할 수 있도록 시간과 리소스를 지원했습니다. 조건은 단 하나, 그 과정과 결과를 팀과 공유하는 것이었습니다.
민호는 달라져 있었습니다. 여전히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였지만, 예전처럼 지시만 하지 않았습니다. 금요일 오후에는 후배들과 함께 작업실 한 켠에서 실험적인 작업을 했습니다.
그가 진행 중인 개인 프로젝트는 "한글 타이포그래피의 재해석"이었습니다. 상업적 목적이 전혀 없는, 순수한 탐구였습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발견한 것들이 실제 프로젝트에도 적용되기 시작했습니다.
최근 프로젝트 미팅에서 클라이언트가 물었습니다.
"민호 디렉터님, 요즘 작업 스타일이 달라진 것 같아요. 뭔가 더 신선하고 대담해 보여요. 무슨 비결이 있나요?"
민호가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권태기를 겪었어요. 그리고 그 권태기가 오히려 저를 다시 성장시켰습니다."
만약 당신이 시니어 디자이너로서 권태기를 겪고 있다면, 그것은 부끄러운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당신이 계속 성장하고 싶어한다는 증거입니다. 만족했다면 권태기는 오지 않습니다.
시니어의 권태기는 주니어와 다릅니다. 기술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의미를 찾지 못해서입니다. 너무 많이 알아서, 모든 것이 예측 가능해서 설레지 않는 것입니다.
하지만 기억하세요. 당신이 쌓아온 경험은 여전히 가치가 있습니다. 다만 그 경험을 새로운 방식으로 활용할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리더가 되는 것도 중요하지만, 창작자로서의 정체성을 잃지 않는 것도 중요합니다.
작은 변화부터 시작하세요. 개인 프로젝트를 시작하거나, 새로운 영역에 도전하거나, 후배들에게서 배우거나, 잠시 멈춰서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지세요. 권태기는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의 신호입니다. 당신의 다음 10년은 지난 10년과 완전히 다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전적으로 당신의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디자이너 동료로서 당신의 여정을 응원합니다.
입자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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