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 디자인으로 고민하는 동료에게-012
디자이너로서 살아가다 보면, 어느 순간 모든 것이 무의미하게 느껴지는 시간이 찾아옵니다. 매일 반복되는 클라이언트 수정 요청, 끝없는 피드백 루프, 그리고 "왜 이 일을 하고 있지?"라는 근본적인 질문. 혹시 지금 이런 감정을 느끼고 계신가요?
특히 경력이 쌓일수록 이런 권태기는 더욱 깊어집니다. 신입 때는 모든 것이 새로웠지만, 이제는 패턴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같은 요청, 비슷한 결과물, 반복되는 프로세스. 어느새 우리는 창작자가 아닌 작업자가 되어버린 듯한 착각에 빠지게 됩니다.
오늘은 디자인권태기를 겪고 있는 한 디자이너의 이야기를 통해, 이 터널을 어떻게 지나갈 수 있는지 함께 살펴보려 합니다. 이 이야기가 여러분에게 작은 위로와 실질적인 해결책이 되기를 바랍니다.
최서윤은 7년차 브랜드 디자이너입니다. 어느 월요일 아침, 그는 평소처럼 출근했지만 뭔가 달랐습니다. 일러스트레이터를 켜는 손가락이 무겁게 느껴졌고, 새로운 프로젝트 브리핑을 받아도 예전처럼 설레지 않았습니다.
"또 카페 브랜딩이네. 지난주에도, 지지난주에도 비슨한 걸 했는데..."
회의실에서 클라이언트의 요구사항을 들으면서도 머릿속은 텅 비어 있었습니다. "내추럴하면서도 모던하게", "고급스러우면서도 친근하게" 같은 익숙한 단어들이 그를 스쳐 지나갔습니다. 예전 같으면 이런 모순적인 요청에서도 창의적인 해결책을 찾아내는 것에 흥분했을 텐데, 지금은 그저 피곤할 뿐이었습니다.
점심시간, 동료 디자이너 민준과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요즘 일하기가 너무 힘들어. 뭘 해도 재미가 없고, 모든 디자인이 다 비슷해 보여. 내가 만드는 것도, 다른 사람이 만드는 것도."
민준이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나도 그래. 3년 전엔 모든 프로젝트가 도전이었는데, 지금은 그냥... 일일 뿐이야. 아침에 눈 뜨는 게 힘들더라."
"그치? 포트폴리오 정리하다가 옛날 작업물 보니까 더 우울해지더라. 그땐 왜 그렇게 열정적이었을까. 지금은 그 열정이 어디로 간 건지..."
그날 저녁, 서윤은 자신의 포트폴리오를 다시 펼쳐봤습니다. 초기 작업들은 거칠지만 열정이 느껴졌습니다. 미숙했지만 시도가 있었고, 실험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최근 작업들은 세련되었지만 어딘가 공허했습니다. 완성도는 높아졌지만 영혼은 사라진 것 같았습니다.
"나는 언제부터 기계처럼 일했을까? 언제부터 안전한 길만 선택하게 됐을까?"
다음 날, 서윤은 평소와 다른 선택을 했습니다. 점심시간에 회사 근처 작은 갤러리를 방문했습니다. 우연히 지나가다 본 신진 작가의 타이포그래피 전시 포스터가 눈에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전시장에 들어서자 손으로 직접 그린 듯한 글자들이 벽을 가득 채우고 있었습니다. 삐뚤빼뚤하고 완벽하지 않았지만, 그 안에서 살아있는 에너지가 느껴졌습니다. 한 작품 앞에서 발걸음이 멈췄습니다.
작가 노트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중요한 건 나만의 이야기를 담는 것이니까요. 이 글자들은 제가 가장 힘들었던 시기에 만들었습니다. 디자이너를 그만둘까 고민했던 그 시간에, 저는 다시 손으로 글자를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그 순간, 무언가가 서윤의 마음속에서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전시장을 나오며 그는 생각했습니다. "나도 언제부터 손으로 뭔가를 그리지 않게 됐지? 도구에만 의존하고, 템플릿에만 기대고..."
사무실로 돌아온 서윤은 조용히 결심했습니다. "오늘부터 내가 정말 하고 싶은 것을 찾아보자."
그는 퇴근 후 개인 프로젝트를 시작했습니다. 클라이언트도 없고, 마감도 없고, 수정 요청도 없는 순수한 창작이었습니다. 처음엔 낯설었습니다. "이걸 해서 뭐가 남지?"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하지만 점차 잊고 있던 감각이 되살아났습니다.
첫 주에는 매일 하나씩 손글씨 레터링을 했습니다. 완벽하지 않았지만, 그 과정 자체가 즐거웠습니다. 둘째 주에는 평소 해보고 싶었던 실험적인 타이포그래피를 시도했습니다. 클라이언트 앞에서는 절대 제안하지 못했을 과감한 시도들이었습니다.
1주일 후, 그는 팀 회의에서 용기를 내어 제안했습니다.
"제가 최근에 개인 프로젝트를 하면서 느낀 게 있는데요. 우리도 매달 하루는 자유 프로젝트 데이를 가지면 어떨까요? 업무와 관계없이 각자 하고 싶은 디자인을 하는 날이요. 실험하고, 실패해도 되는."
팀장이 관심을 보였습니다. "흥미로운 제안이네요.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면 될까요?"
"한 달에 하루, 각자 평소에 해보고 싶었던 디자인 실험을 해보는 거예요. 새로운 툴을 배우거나, 새로운 스타일을 시도하거나, 순수하게 창작하거나. 그리고 그 결과를 팀원들과 공유하는 거죠."
팀장이 미소를 지었습니다. "좋습니다. 이번 달부터 시작해볼까요?"
3개월이 지났습니다. 서윤은 여전히 카페 브랜딩을 하고, 수정 요청도 받았지만, 뭔가가 달라졌습니다. 매달 자유 프로젝트 데이에 그는 타이포그래피 실험을 했고, 이것이 실제 프로젝트에도 영향을 주기 시작했습니다.
최근 카페 브랜딩 프로젝트에서 그는 과감하게 손글씨 로고타입을 제안했습니다. 예전의 서윤이라면 절대 제안하지 못했을 시도였습니다. 완벽한 커브가 아니었지만, 브랜드의 따뜻한 이야기가 담겨 있었습니다.
클라이언트는 그것을 사랑했습니다.
"이게 바로 우리가 원하던 거예요! 세련되면서도 진짜 같은 느낌. 요즘 브랜딩은 다 비슷해 보이는데, 이건 특별하네요. 손으로 만든 느낌이 정말 좋아요."
그 순간 서윤은 깨달았습니다. 권태기는 실력이 부족해서가 아니었습니다. 도전을 멈췄기 때문이었습니다. 안전한 선택만 하다 보니 창작의 즐거움을 잃어버린 것이었습니다.
어느 날, 후배 디자이너가 서윤에게 물었습니다.
"선배님, 최근에 작업하시는 거 보면 되게 즐거워 보여요. 몇 달 전만 해도 힘들어 보이셨는데, 뭐가 달라진 거예요? 비결이 있나요?"
서윤은 잠시 생각하다 대답했습니다.
"권태기는 신호야. 내가 성장을 멈췄다는. 편안한 영역에만 머물렀다는. 그래서 나는 이렇게 했어:
첫째, 작은 실험을 시작했어. 업무 시간의 10%라도 새로운 걸 시도하는 거야. 새로운 툴, 새로운 스타일, 새로운 접근. 실패해도 괜찮아. 중요한 건 시도하는 거야. 나는 매주 금요일 오후 2시간을 개인 실험 시간으로 정했어.
둘째, 인풋을 바꿨어. 디자인만 보지 않고 영화, 음악, 책, 전시에서 영감을 찾았어. 전혀 다른 분야가 의외로 디자인에 새로운 관점을 줬어. 특히 타이포그래피 전시를 본 게 큰 전환점이었어. 그 후로 매달 하나씩 전시를 보러 다녀.
셋째, 개인 프로젝트를 가졌어. 클라이언트 없이, 순수하게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만드는 시간. 이게 진짜 중요해. 상업 프로젝트에서는 할 수 없는 실험들을 마음껏 해봐. 그 경험이 다시 상업 프로젝트로 돌아와.
넷째, 동료들과 솔직하게 이야기했어. 혼자 끙끙대지 말고, 같은 고민을 하는 사람들과 나누니까 위로도 되고 해결책도 보이더라고. 우리 팀은 이제 매달 자유 프로젝트 데이를 하는데, 그게 정말 큰 도움이 돼.
다섯째, 작은 성취를 기록했어. 매일 완성한 작업, 배운 것, 느낀 것을 노트에 적었어. 나중에 보니까 내가 얼마나 성장했는지 보여서 동기부여가 됐어. 권태기 때는 성장이 안 보이거든. 그래서 기록이 중요해."
후배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습니다. "그럼 지금은 권태기가 완전히 사라진 거예요?"
서윤이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아니, 가끔 또 찾아와. 하지만 이제는 대처법을 알아. 권태기가 오면 '아, 지금 변화가 필요한 시점이구나'하고 받아들여. 그리고 새로운 것을 시도해. 권태기는 적이 아니라 성장의 신호니까."
디자인권태기는 부끄러운 게 아닙니다. 오히려 성장의 신호일 수 있습니다. 우리의 감각이 더 예민해졌다는 뜻이고, 새로운 도전이 필요하다는 신호니까요.
중요한 건 이 시기를 어떻게 보내느냐입니다. 방황을 인정하고, 작은 실험을 시작하고, 다시 설레는 순간을 찾아가는 것. 그 과정에서 우리는 더 깊이 있는 디자이너로 성장합니다.
지금 권태기를 겪고 있다면, 내일 한 가지만 다르게 해보세요. 평소와 다른 카페에서 작업하거나, 새로운 컬러 팔레트를 실험하거나, 동료에게 솔직한 이야기를 꺼내보거나, 전시를 하나 보러 가거나. 작은 변화가 큰 흐름을 바꿉니다.
그리고 기억하세요. 당신은 혼자가 아닙니다. 모든 디자이너가 이 길을 지나갑니다. 중요한 건 이 터널을 통과하는 방법을 찾는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더 단단해지고, 더 깊어지고, 더 진정성 있는 디자이너가 됩니다.
당신의 디자인 여정을 응원합니다. 다음 편에서는 디자이너의 자기계발과 성장 전략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입자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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