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환경에서 성장한 에디슨
1화. 바보 에디슨 - 에디슨의 어린 시절에 이어서 갑니다.(https://brunch.co.kr/@ipnomics/1)
1850년대 초반부터 밀란의 지역경제는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철도가 이 지역 인근까지 들어오면서운하를 통한 곡물 수송이 줄어들었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이 밀란을 떠나기 시작했다. 에디슨 가족도 새로운 일자리와 기회의 땅을 찾아 생계의 터전을 마련해야만 했다. 새뮤얼은 마침내 미시간(Michigan)주의 인구 3천 명이 거주하고 있는 작은 마을 포트 휴런(Port Huron)을 새로운 정착지로 결정했다.
포트 휴런으로 이사
그곳은 캐나다 이주민이 많았고 울창한 숲이 있어서 벌목 사업을 하기에 좋았다. 에디슨이 일곱 살 되던 해인 1854년, 가족 모두 포트 휴런에 정착했다. 에디슨 가족이 밀란을 떠나고 난 후 몇 해가 지나 밀란의 운하는 폐쇄되고 항구와 조선소는 사라지는 등 경제는 파탄에 이르렀다. 새뮤얼의 판단이 옳았다.
새뮤엘은 새로운 정착지에서 밀란에서의 경험을 살려 벌목사업을 시작했고 꽤 실력을 발휘하여 돈을 모았다. 그는 이 돈으로 군사시설로 사용되던 2층짜리 건물 매입에 2천 8백 달러를 들여 괜찮은 주택을 마련했다. 주변에는 10 에이커(0.04 km2, 약 1300평)에 이르는 밭도 있었다. 이 새로운 집의 지하 창고는 어린 에디슨의 첫 연구실이 되었다. 그는 벌목사업을 하면서 근처의 호수가 내려다보이는 위치에 8m에 이르는 관광 전망대를 설치하고 관광객으로부터 요금을 받았다. 초기 2~3년 동안은 이 전망대 덕분에 새뮤얼은 부가적인 수입을 올릴 수 있었다. 새뮤얼은 지역의 토지를 매입하고 파는 부동산 사업에 발을 들였다.
아버지의 파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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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6년 가을에 이르면 그의 부동산 가치는 6천 달러(2020년 기준, 약 18만 달러)에 이를 정도로 부풀러 올랐다. 그러나 곧 불행이 닥쳐왔다. 1857년 8월 24일, 오하이오 생명 보험 회사가 파산하고 철도 주식이 폭락하기 시작했다. 미시간의 경제도 연쇄적으로 타격을 받았다. 디트로이트 경제는 완전히 무너졌다. 은행과 기업들이 파산했고 거리에는 빵을 구하기 위한 긴 줄이 늘어섰다. 어린 거지들이 곳곳을 배회하고 다녔다. 새뮤얼 역시 경제 공황을 피해갈 수 없었다. 새뮤얼은 부동산 사기 혐의로 기소되었고 소문은 더욱 나빴다. 1857년에서 1858년 동안에 발행된 신용 보고서는 그를 기업가로서 ‘완전히 실패’한 것으로 낙인찍었다.
농장일을 도우는 에디슨
어린 에디슨은 채소 농장에서 옥수수, 양파 등을 키우면서 부친의 일을 도왔다. 또한, 말 한 필이 끄는 마차를 타고 부친과 함께 집집마다 방문하면서 농작물을 팔기도 했다. 에디슨의 농장 일은 기울어진 가게에 큰 힘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