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디슨은 기차 안에서 신문사 창업을 합니다.
6화 기차안에서 창업(https://brunch.co.kr/@ipnomics/6)에서 이어집니다.
에디슨이 기차 안에서 신문을 팔고 채소 가게를 운영하던 시기는 미국의 정치적 격동기였다. 1860년 에이브러햄 링컨(Abraham Lincoln, 1809 ~1865)이 16대 대통령으로 당선되고 이듬해 3월 취임했다. 링컨 대통령이 당선되자 사우스캐롤라이나는 서둘러 미합중국 탈퇴를 선언했고, 취임 직전인 1861년 2월에는 이미 남부 여섯 개 주가 사우스캐롤라이나의 뒤를 따랐다. 4월에는 남북 전쟁이 시작되었다.
남북전쟁(1861.4.12.~1865.5.13.)이 진행되는 동안에 기차 안에서 신문판매량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에디슨은 채소 가게를 접고 신문판매에 몰두했다. 남북 전쟁의 발발은 모든 신문사에 대하여 엄청난 수요를 일으켰다. 에디슨은 이러한 수요를 보면서 자신만의 신문사를 차리기로 했다. 에디슨은 중고 인쇄기 1대를 구매했다. 인쇄는 기차의 화물칸에서 했다. 에디슨의 신문사, ‘위클리 해럴드(Weekly Herald)’ 1호가 1862년 2월 3일 발행되었다. 에디슨은 조판공, 인쇄공, 편집자, 출판사, 기자, 신문 배달부의 역할을 혼자서 해 냈다. 가격은 한 부당 3센트, 월 단위 정기 구독자에게는 8센트, 발행 부수는 4백 부에 이르렀다. 신문은 독자들에게 지역 뉴스, 기차 운행 일정, 출생 소식, 광고, 달걀과 버터 그리고 채소 가격 등을 담았다. 이것은 단순히 대중의 호기심에 따른 것은 아니었다. 신문으로서의 진정한 가치가 있었다. 이 젊은 신문사 사장은 기차 안의 신문이라는 독특한 저널리즘 사업에서 한 달에 20에서 30달러를 벌어들였다.
남북 전쟁 특수
1862년 4월 9일 수요일, 에디슨은 평소처럼 이른 아침 기차를 타고 디트로이트에 도착했다. 수없이 많은 사람이 기차역의 게시판에 모여 있었다. 게시판에는 지난 일요일 테네시주(Tennessee) 강 근처의 샤일로(Shiloh) 전투 소식이 게재되어 있었다. 북군의 새벽 기습 공격으로 시작된 전투 소식이었다. 월요일 전투 소식은 거의 살육에 가까운 것이었다. 전신을 통해서 계속해서 들어오는 긴급뉴스는 6천 명에 가까운 사람이 사망하거나 부상했다고 전했다. 어린 에디슨은 지역신문인 디트로이트 프리 프레스(Detroit Free Press)’신문 수요가 오후에 급격히 늘어날 것’이라고 내다보았다. 그는 게시판의 내용을 복사해서 그랜트 트렁크의 전신기사에게 그 내용을 포트휴런과 디트로이트사이의 모든 역에 그 알려달라고 부탁했다. 대신에 그는 그들에게 3개월간 신문을 무료로 주겠다고 했다. 에디슨의 뇌물을 받은 전신기사는 이 긴급뉴스를 각 역에 타전했다. ‘각 역의 전신기사는 이 기사를 기차역의 게시판에 붙이고 신문 배달은 오후 4시 북쪽에서 오는 기차 편으로 배달될 것’. 에디슨은 다음으로 디트로이트 프리 프레스로 달려갔다. 그러나 이미 신문인쇄가 마감된 상태였다. 그는 돈 한 푼도 없는 주제에 편집장에게 자신을 믿고 1,000부를 추가 인쇄해 달라고 요구했다. 편집장은 그를 믿어보기로 했다. 에디슨은 1,000부를 가지고 기차에 올라탔다. 첫 번째 역에서 그는 겨우 2부를 팔았다. 다음 역에서 그는 군중들이 기차역 앞에 모여 있는 것을 보았다. 기차가 정차하고 에디슨이 내리자마자 사람들이 그에게로 달려왔다. 35부를 팔았다. 에디슨은 전신이라는 발명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실감했다. 다음 역은 마운트 클레멘트였다. 에디슨은 평소 이곳에서 6부에서 8부의 신문을 팔았다. 에디슨은 신문 수요 예측에 대한 자신의 판단이 틀렸다면 가격은 종전대로 5센트로 하고 만약 신문 수요가 많다면 10센트로 올리기로 마음먹고 있었다. 기차가 플랫폼에 도착하자 군중들은 이미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신문 1부에 10센트에 팔았고 마지막 역에서 25센트에 팔았다. 그의 사업 감각은 빛을 발했다. 그러나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