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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형식 Dec 11. 2021

못 말리는 이탈자들

누군들 이탈을 꿈꾸지 않으랴

긴 장마가 이어지던 어느 해였습니다. 하늘이 한껏 흐려 교실도 어둑신 해졌습니다. 1학년 꼬마들은 어둠과도 금방 친해집니다. 참새처럼 재잘대는 소리가 옅은 어둠과 함께 평화롭습니다. 교실에 들어서면서 스위치를 올렸습니다. 형광등이 아이들 눈빛처럼 깜빡이더니 이내 환해졌습니다. 첫 시간 수업을 위해 어둠은 스스럼없이 물러가 주었습니다.    

  

비 오는 날 생활 수칙은 '운동장에 나가지 않기'입니다. 쉬는 시간에는 각별히 조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단 10분 만에, 아이들은 엄청난 변신을 하고 교실에 들어오기 때문입니다. 물에 빠진 생쥐가 따로 없습니다. 산발한 머리칼과 젖은 옷 그리고 흙 투성이가 된 바짓가랑이, 영락없는 꼬마 도깨비들을 일렬로 세우고 , 털고 닦아서 온전한 제모습을 찾아주려면 공부 시간을 절반이나 까먹습니다.     


어제는 급기야 몇몇 꼬마 도깨비들은 콧물을 찔찔거리며 감기 기운까지 보였습니다. 사정이 그러니 보다 강화된 벌칙으로 으름장을 놓아야 합니다. 나는 사뭇 비장한 목소리로 벌칙을 발표하였습니다.

"쉬는 시간에 운동장에 나가는 사람은 벌 청소!"     


둘째 시간이 끝나고 우유 마시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아이들이 작고 네모난 우유갑을 감싸 안고 아기처럼 꼴깍꼴깍 드십니다. 그 틈을 이용해 나도 옥상으로 갔습니다. 나는 아직 흡연을 휴식으로 여기고 있었습니다. 비 온 뒤 학교 운동장은 황량하여 개미 한 마리도 보이지 않습니다. 나는 회색 하늘 아래서 회색 구름과자를 만들어 드시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교실이 있는 서편 현관에서 운동장 쪽으로 신나게 달리는 점 하나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암탉이 수많은 병아리 속에서도 제 새끼를 감지하듯, 나는 단번에 정체를 파악합니다. 불과 10분 전 교실에서, 훌쩍거리는 콧물을 화장지로 닦아 준 꼬마 도깨비입니다. 아이는 쏜살같이 달려, 운동장 가운데 빗물이 얕게 고인 동그란 물웅덩이 앞에 우뚝 섰습니다. 그리고 서슴없이 바지춤을 내리더니 시원하게 볼 일을 보았습니다. 


볼 일을 본 후 몸 떨림까지는 포착하지는 못했지만, 태연하게 지퍼를 올리고 사방을 둘러본 후,  총알같이 교실 쪽을 향해 달려가는 모습이, 마치 운동회날 손님 찾기 놀이를 하는 것 같았습니다. 아무도 모르게 숨어들어 끽연을 하는 스승과, 아무렴 보면 어때 하고 빗속에서 물총놀이를 즐기는 제자, 우리는 같은 시간대에 해괴한  일탈을 하고 있었습니다. 


아이보다 훨씬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고 있었지만, 아무래도 내가 한 수 아래라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나는 씁쓸해진 입안으로 민트향 스프레이를 칙칙 뿌리고 옥상을 내려왔습니다. 그리고 셋째 시간이 시작되자, 아이들 향해 말했습니다.

"우유 마시고 나서 운동장에 나간 사람, 순순히 손 들어 보시지."     


그런데 이것 참 의외였습니다. 이탈자가 그 꼬마뿐만 아니었습니다. 여기저기 다른 녀석들이 손을 들고 자백을 하였습니다. 내가 감지하지 못한 이탈자들이 어느 구석에서 어떤 해방감을 누리고 돌아왔는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동안 비가 그쳐 누구도 비에 젖지 않았고, 모두 나름대로 해방감을 즐기고 무사히 복귀했다는 사실입니다.  


긴 장마에 잠깐 비 그쳤다고 아기 염소들도 나들이를 하는데, 하물며 개구쟁이들이야 오죽하겠나 싶어 모르는 척 용서했습니다. 하지만 아이들 일탈은 자유로움에 가까웠고, 어른인 나는 모양이 좀 그랬습니다. 그래서 내가 나에게 진심으로 부탁하는 마음으로 말했습니다.

"애들아, 이제 우리 좀 그러지 말자. 응?"     


아이들이 한 목소리로 “예!” 하고 외쳐 주었습니다. 그날 이후 나도 그 궁상스러운 이탈을 멈추었습니다. 


<사진 출처,  픽사 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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