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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형식 Oct 30. 2021

청출어람

쪽풀보다 푸른 그 빛

우리 교실에 교생 선생님들이 몰려왔다. 무려 다섯 명이나! 교실은 비단잉어가 들어온 연못처럼 금방 화사해졌다. 나의 제자들은 그날부터 담임을 나 몰라 라하고 비단잉어에 눈을 뺏긴 붕어들처럼 교생 선생님 꽁무니를 따라다녔다. 나는 졸지에 찬밥이 되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옛날 옛적에 젊은 소실이 들어와 한집에서 살게 된 본처의 마음을 알겠다. 나는 마음 착한 본처처럼 옷고름을 입에 물고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꿈같은 시간은 화살보다 빠르다. 아쉬운 작별의 날이 왔다. 교생 선생님들은 아이들한테 줄 작은 선물과 손 편지를 준비했다. 아이들은 떠나가는 선생님들을 위해 장기자랑 시간을 가졌다. 리코드를 연주하고  아이돌 군무를 선보이고 빗자루 연주를 하였다. 나 또한 즐거운 마음으로 기꺼이 구렁이 알 같은 용돈을 축내어 초코파이와 음료수를 사서 뒤풀이를 도와주었다.

      

마침내 교생 선생님들이 떠나갈 시간이 되었다. 교실은 가랑잎 분교 졸업식장을 방불케 했다. 옷자락을 붙들고 가지 말라고 하는 아이, 다음에 꼭 만나자고 새끼손가락을 거는 아이, 창문 밖을 바라보며 울먹이는 아이. 아! 이 철부지들이 내년 2월 졸업식장에서도 나를 위해 이런 감동적인 장면을 연출해줄까 싶었다. 나는 얼른 정신을 차리고 중얼거렸다. ‘꿈 깨! 아무튼 약속된 시간은 오고 교생 선생님들은 손 편지를 남기고 교실을 떠나갔다.      


아이들이 교생 선생님들이 주고 간 편지를 읽고 있었다. 가자미 눈으로 슬쩍 훔쳐보았더니 과연 비단잉어들이었다. 생전 처음 보는 세련된 편지봉투와 젊음이 똑똑 묻어나는 개성 있는 글씨체. 심심한 교과서 글씨체만 보던 아이들이 혹 하고 빠질만했다. 몇몇 여학생들은 책상에 엎드려 흑흑 울었다. 그런데 그 와중에 눈이 벌겋게 충혈된 남자아이가 앞으로 나와서 내게 말했다.  

“선생님, 정열이는 편지를 못 받았어요.”

“응?”     


그럴 수가! 정열이한테 가서 정말로 편지를 못 받았냐고 물어보니 고개를 끄덕였다. 이게 어찌 된 일일까. 정열이는 우리 반에서 제일 착한 아이다. 너무 착해 불량기 있는 개구쟁이들도 함부로 대하지 않을 정도다. 그런데 편지를 못 받다니. 정열이는 섭섭한 마음을 감추고 있다가, 교생 선생님들이 떠나자 혼자 눈물을 흘리고 있었던 것이다.  

    

총명한 교생 선생님들이 그럴 리가 없는데, 뭐가 잘못됐을까. 나는 찬찬히 그 원인을 찾아보았다. 아! 내 불찰이 컸다. 애초에 교생 한 명당 여섯 명씩 아이들을 배정하여 개별지도를 맡겼다. 그런데 내가 건네준 명단에 정열이 이름이 빠져 있었던 것이다. 이 일을 어찌해야 되나? 눈앞이 캄캄해졌다. 정열이한테 있는 그대로를 말하고 온전히 선생님 실수임을 말하고 사과했다.       


하지만 이미 상처 입은 아이 마음을 달래줄 방법이 없었다. 나는 우선 상찬용으로 가지고 있던 도서문화상품권 한 장을 건넸다. 정열이도 궁색한 담임 마음을 이해하는 듯 눈물을 닦았다. 그런데 수업을 마치고 아이들이 떠나간 뒤, 교사용 책상을 정리하다 보니 흰 봉투가 있었다. 뭔가 싶어 열어보니 짧은 편지와 도서상품권이 들어 있었다. 정열이가 두고 간 것이었다. 


- 선생님께

도서상품권 다시 돌려 드리겠습니다. 고작 편지 한 장 못 받았다고 도서상품권 받으면 다른 사람은 기분이 어떻겠습니까? 그래서 이 도서상품권 다시 돌려 드리겠습니다. 편지 한 장 정도는 시간이 지나면 잊어버릴 수 있습니다. -     

미안하고 마음이 아팠다. 어리석은 담임이 텅 빈 교실에서 혼자 한숨 쉬고 있던 바로 그 시간, 운동장에는 또 다른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수업을 마치고 운동장에서 축구를 하던 우리 반 아이들이, 때마침 뒤늦게 학교를 떠나가던 교생 선생님 한 명을 발견하였다. 아이들은 교실에서 있었던 일을 교생 선생님에게 말하였고, 교생 선생님은 재빨리 휴대폰 문자를 날렸다. 그리고 잠시 후 교문을 나서서 뿔뿔이 흩어졌던 다섯 명의 교생 선생님들이 다시 학교로 돌아왔다. 교생 선생님들은 운동장 플라타너스 나무 아래에 모여 한 아이를 위한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다음 날 아침 조회 시간, 나는 어제 일은 교생 선생님들 실수가 아니라 온전히 내 탓이었음을 공개적으로 밝혔다. 어제 아이들이 하교하고 난 뒤 벌어진 일도 빠짐없이 말해주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다소 떨리는 목소리로 기쁜 소식을 전했다.

“하늘이 도운 것처럼 편지가 돌아왔다. 그것도 무려 다섯 통이나!”     


교생 선생님들이 정열이를 위해 쓴 다섯 통의 편지를 보여주었다. 아이들의 탄성과 박수 소리가 쏟아졌다. 아이들 사이로 정열이가 걸어와서 수줍은 듯 편지 다섯 통을 받았다. 나는 비로소 졸였던 가슴을 쓸어내렸다. 


청출어람, 쪽에서 우러난 푸른빛이 쪽보다 푸르다고 했다. 부족한 스승이 ‘바담 풍’이라고 잘못 말해도 ‘바람 풍’으로 알아듣는 슬기로운 아이들.  그리고 풋풋한 교생 선생님들 덕분에 쪽풀보다 맑고 청아한 그 푸른빛에 어리석은 내 마음을 씻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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