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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형식 Nov 01. 2021

들에 핀 장미화

나는 그것을 첫사랑이라고 우겼다.

어렸을 때부터 나는 좀 불량스러웠다. 국민학교 일 학년 때 찍은 흑백사진을 보면 단박에 알 수 있다. 사진 속에는 젊고 고운 우리 엄마가 막내를 안고 있고, 누나와 동생이 그 앞에 다소곳이 차렷 자세로 서있는데, 내 모습이 가관이다. 약간 삐딱하게 서서 짝다리를 짚고 눈을  찡그리고 올려다보는 품새가 금방이라도 한방 칠 품새다.    

  

실제로 나는 공부보다 놀기를 좋아했다. 항상 해 질 녘까지 학교 운동장에서 친구들과 총싸움을 하면서 뛰어놀았다. 그렇게 놀다 보면 해가 저물고 학교를 지키는 소사 아저씨가 이제 모두 집으로 돌아가라고 큰소리로 우리들을 내쫓았다. 하지만 우리는 미꾸라지처럼 이리저리 도망치며 어른을 놀렸다. 그러다가 며칠 후, 잡혀서 개 맞듯 두드려 맞았다. 나는 바닷바람 드센 남쪽 지방에서 그렇게 자랐다.       


그런데 우리 집이 갑자기 서울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엄마 손을 잡고 서울 충무국민학교에 전학을 하는 날, 엄마는 나를 달걀보다 더 반들반들하게 목욕을 시키고, 서울 아이들처럼 멋진 아동복을 지어 입혔다. 그 정성이 통했는지 어쨌는지 선생님도 지방 출신 전학생을 반에서 제일 예쁘고 공부 잘하는 여학생 옆자리에 앉혀 주었다. 하지만 선생님 배려는 내가 입을 다물고 있던 시간까지만 유효했다.   

   

첫날, 쉬는 시간에 아이들이 다가와 말을 붙였다. 그런데 이상했다. 분명히 한국말인데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럴만했다. 그 시절 마산역에서 밤 열차를 타면 밤을 꼬박 새우고 새벽이 되어야 서울역에 도착할 수 있는 거리였다. 나는 태어나서 처음 서울과 텔레비전과 서울내기들을 만났다. 우리 반 아이들도 말로만 듣던 촌놈을 처음 보았던 것 같다. 나를 둘러싼 아이들이 저희들끼리 하는 말은 이랬다. 

“얘한테 물었껄랑 근데 말이 말야 울과 쫌 따른것과아. 너어무 이상해 그치?”

“마저마저!”     


서울말은 빠르고 유려했다. 그에 비해 내 경상도 사투리는 거칠고 투박했다. 나는 서울내기들 속에서 기죽지 않았다. 

“머라꼬? 몬알라묵것따.”

“머라꼬가 뭐니? 말해봐! 빨랑!”

“빨랑이 머꼬? 가시나야!”

“어머머 오또케.”     


하지만 결정적으로 내 수준이 탄로 난 것은 공부. 선생님이 나를 호명하더니, 배울 부분을 읽어보라고 할 때였다. 그때 나는 놀기에 바빠서 아직 받침 있는 글자를 아직 다 깨치지 못한 상태였다.    

“어머니가...심부르..어가씀미다.....상저에는무...거..만나슴미다”     

당달봉사 개울물 건너듯 더듬더듬 책을 읽는 내 수준은, 운율과 박자를 살려 또박또박 읽는 서울 아이들에 극명하게 대비되었다. 선생님은 이제 됐으니 그만 앉으라고 했다. 그리고 다음 날, 선생님은 우리 반에서 제일 예쁜 여학생 옆이었던 내 자리를 바꾸어 버렸다.


새 짝꿍은 눈꼬리가 올라가고 안경을 쓴 여자아이였다. 그 아이는 무지렁이 촌닭과 짝이 된 것을 무척 억울해하는 듯했다. 그래서 책상 가운데 38선을 그어놓고 책이나 공책이 넘어가면 사정없이 줄을 좍 그었다. 어쩌다 손이 넘어가도 봐주는 법이 없었다. 사정없이 연필로 손등 위에 금을 그었다. 

“이 가시나가! 칵 고마!”     

주먹을 치켜들고 억센 욕설로 대항했지만, 총알처럼 빗발치는 표준말을 당해 낼 재간이 없었다. 나는 직설적이고 폭력적이었고 혼자였다. 서울 아이들은 이성적이고 간접적이고 집단적이었다. 


아이들은 이런 말을 노래에 얹어 나를 놀렸다.

“시골 놈 촌 놈 말라빠진 시골 놈 얼레리 꼴레리 

시골 놈 촌 놈 말라빠진 시골 놈 얼레리 꼴레리....”     

나도 지지 않고 이런 노래로 갚아 주었다.

“서울내기 다마내기 맛 좋은 고래고기

 서울내기 다마내기 맛 좋은 고래고기”      

그렇게 티걱태걱하면서 나는 천천히 개밥에 도토리가 되었다. 


청소 시간도 혼자였다. 수업을 마치는 종이 울리면 서울 아이들은 잽싸게 청소함으로 가서 빗자루나 걸레를 챙겼다. 하지만 나는 빗자루나 걸레를 차지하지 못하고 물통 당번이 되었다. 물통을 들고 수돗가로 가서 걸레를 빨 물을 길어오는 것이 매일 청소시간에 내가 할 일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설상가상 물통마저 빼앗겨 버렸다. 아이 두 명이 작당해서 먼저 물통 차지해 버린 것이다. 나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교실 한가운데 섬처럼 서 있었다. 누구도 나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내 앞으로 여자 아이 한 명이 스쳐 지나가는가 싶더니, 자기가 들고 있던 빗자루를 내 앞에 톡 떨어뜨렸다. 나는 '어?' 하면서 내 발끝에 있는 빗자루와 모르는 척 지나가는 여자 아이 뒷모습을 번갈아 보았다.

      

그 아이는 나와는 반대로 늘 다소곳하고 단정 하고 공부를 잘해서 자주 선생님 칭찬을 받는 아이였다. 짧은 순간 어렴풋하게 배려 같은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빗자루를 주워 그 아이한테 돌려주어야 하는지, 아니면 그냥 내가 가져야 하는지 우물쭈물하였다. 그렇게 망설이고 있는데 어디선가 나타난 다른 아이가 나타나서 순식간에 빗자루를 주워 가버렸다. 나는 또 바보처럼 교실 한가운데 멍 하게 서있었지만 마음이 따뜻해졌다.  


그 일이 있고 얼마 안 있어 봄 소풍을 갔다. 점심 도시락을 먹고 장기자랑이 시작되었다. 선생님은 앞에 나와 노래 부를 사람 손 들어 보라고 했다. 그런데 아이들은 약속이나 한 듯 소리를 쳤다.  

“김정임! 김정임! 김정임!”     

그 아이 이름이었다. 수줍은 듯 말이 없던 그 아이가 노래를 부르리라고 상상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전학 온 나만 빼고 그 아이가 노래를 잘한다는 것을 다 알고 있었다. 아이들 등쌀에 밀려 앞으로 나온 그 아이는 정말 노래를 잘 불렀다. 나는 아이들 틈에 끼여 천사 같던 그 모습을 숨죽여 바라보았다. 


“♪웬 아이가 보았네 들에 핀 장미화

갓 피어나 어여쁜 그 향기에 탐나서

정신없이 보네 장미화야 장미화 들에 핀 장미화 ♪~”     


그 후 아홉 살의 서울살이는 서울 표준어를 자연스럽게 사용하게 되면서 점점 안정되었다. 서울 친구들이 조금씩 내게 다가오고 나도 순해졌다. 


젊은 시절, 첫사랑 이야기가 나오면 그 아이를 떠올렸다.  그런데 참 이상했다. 그 얼굴과 이름과 노래 빼놓고는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분명히 상황이 좋아지고 날마다 한 교실에서 공부하고 놀았는데, 짧게라도 눈이 마주치거나 말을 나눈 기억이 없었다. 그래서 친구들과 첫사랑 또는 짝사랑 이야기가 나오면 그 이야기를 동화처럼 각색해서 들려주었다. 그리고 그것을 첫사랑이라고 우겼다. 


또 오랜 시간이 흘렀다. 이제 그 얼굴도 희미하고, 그 이름도 확실한지 아리송해졌다. 나는 이제 그것을 첫사랑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 아이 얼굴과 이름마저 조금씩 잊혔지만, 아이에 대한 고마움은 장미화로 채색된 고운 추억으로 남았기 때문이다. 무리에서 소외된 투박한 아이를 위한, 어떤 아이의 순수한 마음이 지금도 들에 핀 장미화처럼 내 가슴에 싱싱하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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