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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형식 Nov 19. 2021

축구 열전

자네 혹시 축구 감독 맡아볼 생각 없나?

젊은 남자들이 모이면 제일 많이 하는 이야기가 군대 이야기라고 한다. 두 번째로 많이 하는 이야기는 축구 이야기고 세 번째는 군대에서 축구 한 이야기란다. 나도 그렇다. 옛날 옛적 총각 시절, 공원에서 그녀와 데이트를 하는데, 아이들이 축구를 하고 있었다. 나는 대화를 잠시 멈추고 축구 구경을 했다. 그런데 그녀가 갑자기 “참, 이상한 사람도 다 있네”라고 하더니, 빨딱 일어서서 가버렸다. 나중에 알고 보니 나는 입을 딱 닫고 한 시간 넘게 공을 따라 이리저리 고개만 돌리고 있었다. 

    

유년 시절에 내가 제일 받고 싶었던 것이 축구화요. 제일 탐나는 옷이 등번호가 적힌 축구 유니폼이었다. 내가 제일 오르고 싶던 자리는 교장 자리가 아니라, 조기 축구팀 오른쪽 날개 공격수 자리였다. 그런데 어느 해, 나는 엉겁결에 그 영광을 누리게 되었다. 지금부터 그 이야기를 하려는데, 이야기가 축구인만큼 제법 길어질 수밖에 없으니 참고 바란다.      


그해 새 학년 담임 배정이 발표되었다. 교장은 나를 기피 학년인 6학년에 다시 주저앉혔다. 회식자리에서 교장한테 쓴소리 하다가 괘씸죄에 걸린 것이다. 교장은 지난해 함께 했던 6학년 선생님들은 모두 원하는 학년으로 보내주었다. 오로지 나만 낙동강 오리알이 된 것이다. 하지만 그 야만스러운 보복성 인사에도 내 영혼이 털끝만큼도 흔들리지 않은 것은 축구 덕분이었다.       


매주 수요일 특별활동 시간이 되면, 나는 체육복을 갈아입었다. 운동장에는 4학년부터 6학년까지 40명이 넘은 아이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날도 호루라기를 삑삑 불며 공을 차는 아이들을 따라 뛰어다니고 있는데, 아이 한 명이 쭈뼛쭈뼛 다가와 이렇게 말했다.

“감독님, 저는 종이접기부인데요. 축구부 넣어 주시면 안 돼요?”     


아! 축구감독. 그 순간 마음속에서 뭔가 쿵쾅쿵쾅 방망이질을 하였다. 그래 특별활동 축구부 담당 선생님이 아니라 축구감독이다! 축구부를 만들자! 그즈음 초등학교마다 축구클럽 붐이 일어났다. 인근 부자 동네 학교는 외부코치를 영입하고 축구클럽을 만들어 운영하였다. 우리 학교는 그럴 형편이 되지 않았다. 나는 맨땅에 헤딩하듯 모든 걸 혼자 다 맡았다. 감독. 코치. 팀 닥터. 빵 셔틀 등등!       


먼저 학교 대표선수를 선발했다. 선발 조건은 남들보다 한 시간 일찍 학교 와서 연습할 수 있는 고학년으로 했다. 그랬더니 공이 차고 싶어 안달이 난 아이 23명이 지원하였다. 우리는 공포 외인구단이었다. 학교에서 빵 하나 음료수 한 병 지원해주지 않았지만, 아이들은 상쾌한 아침 하늘 위로 뻥뻥 공을 차 올리는 것만으로도 행복해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교육장기 초중학교 축구대회 날이 되었다. 나는 아침 연습을 포기하지 않는 아이들 모두 대회에 데려가겠다고 한 약속을 지켰다. 


일 차전은 벌떼 작전을 준비하였다. 벌떼처럼 달라붙는 작전이 아니라, 꿀벌이 수시로 벌통을 드나드는 것처럼, 자꾸자꾸 후보 선수를 교체하는 것이다. 그래서 승패와 상관없이 후보를 포함한 선수 전원이 한 번씩은 잔디구장을 밟아보게 하는 것이 일차 목표였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첫 경기 상대팀이 갑자기 기권을 하였다. 전혀 반갑지 않은 부전승이었다. 까딱하면 후보 선수들이 줄창 엉덩이로 의자만 데우고 있을 판이었다.      


예선 두 번째 경기 상대는 부잣집 동네 학교 축구팀이었다. 우리 선수들은 체육 시간에 입는 체육복 차림인데, 그 팀은 등번호에 선수 이름까지 적힌 멋진 유니폼을 입고 있었다. 게다가 어떤 사람이 뒷짐을 지고 우리 쪽으로 오더니 지나가는 말투로 “힘들 텐데... 저 학교 감독은 선수 출신 감독이라던데 이라던데”라는 말을 흘리고 갔다. 은근히 우리 선수들을 기를 죽이려는 상대편 수작이었다. 전의가 확 불타올랐다. 


경기가 시작되자, 온몸이 근질근질했던 우리 선수들은 상대방이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휘몰아쳤다. 결과는 1:0으로 우리가 승리했다. 오늘 우리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가! 정신을 차리고 보니, 당당히 2연승을 거두어 8강이 겨루는 본선에 진출했다는 것이다. 


다음날 공설운동장에서 본선 경기가 열렸다. 관중석에는 상대팀 학부모들이 진을 치고 북과 꽹과리를 울리며 필승을 외치고 있었다. 상대편 감독과 코치 그리고 선수들 표정도 한껏 비장해 보였다. 우리 팀과는 대조적이었다. 우리 선수들은 생전 처음 공설운동장 축구 경기장에 서 있다는 것만으로 신기하고 행복했다. 감독인 나도 어린 선수들도 모두 국가대표가 된 기분이었다. 느낌이 좋았다. 작전명은 하룻강아지였다.     


범 무서운 줄 모르는 하룻강아지처럼 무조건 돌격! 상대편이 긴장하고 있을 때, 자기 포지션에 상관없이 모두 축구공을 따라 겁 없이 달려드는 작전이었다. 상대 선수들은 듣도 보도 못한 전술에 당황하여 허둥지둥했다. 전반 15분경 우리가 보란 듯이 선제골을 넣었다. 상대편도 곧바로 동점골을 넣었다. 후반전, 접전 끝에 다시 우리 공격수의 슛이 네트를 갈랐고 이내 종료 휘슬이 울렸다. 또 이겼다. 자랑스러운 하룻강아지들은 태극전사처럼 서로 얼싸안고 춤을 추었다.        


대망의 4강 준결승. 강력한 우승 후보인 상대는 뛰어난 개인기와 조직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진짜 감독처럼 생긴 상대편 감독이 시종일관 운동장을 향해 꽥꽥거렸고, 젊은 코치와 잘 훈련된 선수들은 날렵하게 작전지시를 했다. 장난이 아니었다. 전반 초반 우리는 순식간에 두 골을 먹었다. 이후 계속 고전을 면치 못하다가 전반전을 0:3으로 마쳤다. 어린 선수들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힘들어했다.     


후반전, 마침내 우리도 한골을 넣었다. 스코어는 1:3. 시소게임은 계속되고 추가골은 터지지 않았다. 마음이 바빴다. 더 이상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나는 불꽃같은  승부욕을 접고 결단을 했다. 몽땅 떨이 작전!  주전 선수 5명을 빼고, 그동안 한 번도  출전하지 못한 후보 5명 모두를 투입하였다. 무려 10명의 선수들이 들락날락하느라 경기가 잠시 중단되었다. 그때 갑자기 운동장에 서 있던 우리 학교 선수 하나가 나를 향해 큰 소리로 말했다. 

“감독님! 후보들을 공격 자리에 넣으면 어떡해요!!!”     


나에게 최초로 감독이라고 호칭한 5학년 아이였다. 아이 목소리가 워낙 커서 심판조차 깜짝 놀라 나를 쳐다보았다. 아이는 ‘모두가 한 번씩은 잔디 구장을 밟아 보자’ 우리들 만의 약속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나는 얼른 검지 손가락을 입술에 대어 쉬쉬 해 보였다. 경기가 다시 속개되고 우리의 후보 선수들은 죽을 둥 살 둥 운동장을 뛰어다녔다. 그러나 최종 결과 1:4로 경기가 종료되었다.      


아무도 화내거나 울지 않았다. 나는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힌 아이들 얼굴을 하나하나 닦아주었다. 샤방샤방 빛나고 기특하고 사랑스러운 선수들이었다. 우리는 마지막으로 잔디 구장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었다. 그런데 공설운동장 드높은 스피커에서 나를 찾는 방송이 쩡쩡 울려 퍼졌다. 

“촉석초등학교 감독님은 본부석으로 오셔서 트로피와 메달을 수령 해 가시기 바랍니다.” 


아! 초짜 감독은 준결승에 오른 두 팀이 공동 3위가 된다는 대회 규정을 모르고 있었다. 주장과 나는 눈썹을 휘날리며 달려가서 금빛 트로피를 안고 왔다. 우리 선수들이 환호성을 울렸다. 아이들이 텔레비전에 나오는 국가대표처럼 커다란 트로피를 앞세우고 트랙을 돌았다. 그 모습을 보니 뭉클하고 눈물이 찔끔 나왔다. 나는 고개를 숙이고 히딩크처럼 천천히 잔디구장을  걸었다. 그런데 누군가 내 뒤를 따라올 것만 같았다. 그리고 내 어깨를 톡톡 치며 이렇게 말할 것 같았다. 

“자네 혹시 프로축구팀 감독을 맡아볼 생각 없나?”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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