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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형식 Nov 06. 2021

노란 모자

그날 전교 조회시간 우리 반 퍼포먼스

어떤 때 아이들은 분봉을 시작하는 벌떼같다. 요란한 소음과 무질서한 비행으로 보는 이의 넋을 단숨에 빼놓는다. 하지만 알 듯 모를 듯한 그들만의 교감이 미미하게 느껴질 때가 더러 있다. 지난 월요일 아침이 그랬다.     

아무도 없는 교실에서 내가 창문을 열 때쯤, 여느 날과 다름없이 개구쟁이 종배가 제일 먼저 들어왔다. 그날은 다른 날보다 더 빨리 왔다. 

“안녕하세요!”


꼬맹이 목소리가 제법 우렁찼다. 종배는 제자리에 가방을 걸어놓고 곧바로 뒷편 사물함 쪽으로 갔다. 그리고 지난 토요일에 나누어 준 노란색 모자를 꺼냈다. 꼬마는 내가 쳐다보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교실 벽에 걸린 커다란 거울 앞에 섰다. 노란 모자가 마음에 드는 모양이다. 


꼬마는 모자를 쓴 제 모습을 요리조리 지켜보며 한참을 서 있었다. 윗 창은 없고 모자 챙과 끈만 달린 이른바 ‘썬 캡’이다. 아침부터 난데없는 나 홀로 패션쇼에 속으로 웃었지만, 나는 사실 그 문제의 노란 모자만은 마뜩지 않았다. 그것은 면내 초등학교 축구대회 후원 기념품으로 인근 회사에서 기부한 것이다. 노란 선캡 끈에는 기념품을 제공한 사실을 알아 달라는 듯 회사 이름이  굵게 인쇄되어 있었다. 순수한 선물이 아니라, 기업 홍보물 같은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나는 아이들이 광고의 일부로 쓰이는 것 같아서 영 마뜩지 않았다. 그러나 내 심사가 그렇거나 말거나 아이들은 노란색 챙 모자를 무척 좋아했다.      


지난 토요일 종례 시간에 모자를 받던 아이들 들뜬 표정이 그랬다. 아홉 살 꼬마들은 마치 하늘에서 난데없이  선물이 떨어진 것처럼 좋아했다. 저희들끼리 한참 패션쇼를 해 보이더니, 수업이 시작되어도 벗을 줄을 몰랐다. 나는 아이들에게 각자 모자에 자기 이름을 쓰고 자기 사물함에 넣어 두자고 했다. 집에 가져간다면, 월요일 등교 할 때 모자를 잊고 안 챙겨 오는 아이가 있다. 그 아이는 모자를 쓴 친구들이 부러워서 종일 입을 삐쭉거릴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나는 월요일 날 3교시 체육 시간에 쓰고 싫건 놀아보자고 했다.      


종배가 다른 날 보다 더 빨리 학교에 온 이유는 바로 그것이다. 노란 모자를 쓰고 싶어서! 그 순진무구한 동심을 보니, 오늘 꼬마님들이 뭔가 귀여움을 선물해 줄 것 같아 웃음이 나왔다. 교실 옆 휴게실로 가서 커피 한잔을 타 마셨다. 그런데 커피를 다 마시기도 전에 휴게실 문이 드르륵 열리더니, 우리 반 꼬마 얼굴이 문 사이로 쏙 들어왔다.

“선생님, 우리 체육 하러 가면 안돼요?”     


아침부터 웬 체육? 지금은 책 읽기 시간인데? 나는 남은 커피를 홀짝 마시고 일어섰다. 흐트러진 아침 분위기를 잡아야 한다. 꼬마 뒤를 따라 교실로 들어서니 이게 웬일인가. 우리 교실에 때아닌 개나리꽃이 만발하였다. 어느새 등교를 한 꼬마들이 모두 노란 모자를 쓰고 마치 볼 일이 있는 것처럼 부산하게 교실을 휘젓고 다녔다.     

그러니까 이왕 햇빛 가리개용 노란 모자를 썼으니 체육을 하자는 말이다. 나는 눈과 목에 힘을 주며 말했다.

"애들아, 지금은 독서활동 시간이고, 선생님은 교무실에 회의 가야 할 시간이야. 모두 모자 벗고 제 자리로!"

그런데도 몇몇 녀석은 내 주위를 맴돌며 “아, 체육이 너무 하고 싶다” ’라며  엄살을 부렸다. 나는 단호하게 뿌리치고 교무실로 갔다. 아침 교무회의 안건 중에 월요일 전교 조회 실시 건이 나왔다. 아침부터 날씨가 더우니 운동장이 아닌 실내로 변경해서 조회를 하자는 의견이었다.  


갑자기 장소가 바뀌는 바람에 내가 바빠졌다. 방송 담당인 나는 교내 방송을 하였다.

“각반에 알립니다. 오늘은 날씨가 더운 관계로 다목적실에 전교 조회를 실시합니다. 책상을 정리하고 다목적실로 모이기 바랍니다.”     

잠시 후, 그날 시상할 상장과 마이크 등을 챙겨, 다목적실로 부랴부랴 내려갔다. 정신없이 방송 마이크를 설치하고 시상대와 그날 시상 준비를 하였다. 그리고 교장선생님이 입장하자마자 곧바로 국기에 대한 경례로 전교 조회가 시작되었다.      


내가 우리 반 아이들 범상치 않는 모습을 발견한 것은, 방송기기 뒤에 숨어 애국가 반주곡을 틀어주고 아이들을 향해 돌아설 때였다. 100명 남짓한 아이들 속에 노란 모자 18개가 눈부시게 빛났다. 우리 반 아이들은 시키지도 않는 집단 퍼포먼스를 벌인 것이다. 아이들 모두 일사불란하게 노란 모자를 쓰고 힘차게 애국가를 부르고 있었다. 

 

평소에는 고학년들 사이에 끼여 보일락 말락 하던 아이들 모습이 키 큰 고학년을 압도하고 있었다. 애국가를 부르는 목소리도 제일 큰 것 같았다. 그 모습이 어찌나 특이하고 늠름했던지, 조회를 마칠 때까지 그 누구도 실내에서 모자 예절을 말하지 않았다. 전교생과 교직원 모두 위풍당당한 2학년 모습에 선망의 눈길을 보내주었다. 만약 우리 반 아이들이 거수경례를 알았다면, 교장선생님에 대한 인사도 절도 있는 군인처럼 경례를 붙일 것 같았다.         


누군가 나에게 하루 중에서 교사로서 제일 행복한 순간을 물은 적이 있다. 물론 최고의 순간은 제 시간에 퇴근하는 순간이다. 그 다음은 아이들이 귀여울 때다. 나는 오랜 동안 귀여운 그 모습을 보는 맛으로 교사를 했다. 세번째는 나는 아무것도 한 일이 없는데, 아이들이 저절로 뭔가를 잘 해서 기특하게 보일 때다. 그날 우리반 꼬마들은 이 세 가지를 한꺼번에 주었다. 귀여움, 기특함, 그리고 오늘도 무사한 퇴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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