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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형식 Nov 20. 2021

고수를 그리며

그날 이후 나는 착하게 살았다.

오래된 앨범 갈피에 낡은 사진 한 장, 젊은 우리 엄마가 환한 웃음을 지으며 젖먹이 동생을 안고 있다. 그 앞에 올망졸망 나머지 우리 형제들이 서 있다. 손아래 동생은 놀란 토끼눈으로 차렷 자세로, 누나는 사진기를 향해 밝게 웃고 있는데, 여덟 살인 나는 한쪽 발을 앞으로 내민 삐딱한 자세로 정면을 째려보고 있다. 소싯적 내게 불량기가 있었음을 증명하는 흑백사진이다. 그랬다. 어린 시절 난 좀 불량했다. 고등학교 일 학년 때 그 선배를 만나기 전까지.      


시골에서 중학교를 마치고 인근 도시에 있는 공업고등학교에 진학했다. 교실에서 공부하는 시간보다 실습장에서 기계와 씨름하며 보내는 시간이 많았다. 국가에서는 공고 실습복에  ‘기술인은 조국 근대화의 기수’라는 견장을 달아주고 자긍심을 부추겨 주었다. 그러나 우리는 인문계 아이들한테 이미 공돌이라고 불리고 있었다. 가난한 흙수저 출신 일곱 살 청춘들은 우울했다.       


나는 입학하자마자 친구 한 명과 신경전을 벌이고 있었다. 나처럼 시골 출신으로 도시에 유학 온 같은 반 종백이. 나는 그 녀석이 거슬렸다. 얼굴에 각이 지고 어깨를 좌우로 흔들며 건들건들 걷는 품새가 특히 맘에 들지 않았다. 가는 눈빛이 그러니 오는 눈빛도 당연히 뾰쪽했다. 종백이도 내게 뒤틀리는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우리는 자주 으르렁 거렸고 어느 날 기어코 맞짱이 들어왔다.  

“한판 붙어 볼래?”

“붙자.”

“수업 마치고 교문 앞에서 보자.”

“좋다”     


강물과 솔밭 사이, 아무도 없는 백사장에 우리는 마주 섰다. 나는 손목과 발목을 돌리면서 긴장을 풀고, 종백이는 웃통을 벗어젖혔다. 그런데 녀석은 웃통뿐만 아니라 바지까지 벗어던지고, 팬티 차림 공격 자세에 취했다. 왕년에 싸움박질 좀 해보았다는 무언의 메시지 같았다. 나는 당혹스러웠지만 속내를 감추고 이소룡처럼 가슴께로 주먹을 들어 올렸다. 인적 없는 백사장에서 우리 둘의 결투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한참을 치고 박던 어느 순간, 종백이의 코에서 피가 주르르 흘렀다. 하지만 코피가 상황 종료를 대신하던 어린 시절이 아니었다. 종백이는 급격히 흥분해 주먹을 휘두르고, 흐르는 코피를 제 손바닥으로 훔쳐 가며 무자비하게 달려들었다. 승부는 쉽게 결정 나지 않았고 우리 둘은 급속히 치쳐갔다. 숨이 턱까지 차올라 더 이상 싸울 기력이 없었다. 불도저처럼 밀어붙이던 종백이도 걸음도 제대로 떼지 못하고 헉헉거렸다. 내가 먼저 주먹을 내리고 말했다.

“그만 하자”


나는 벗어놓은 교복을 옷을 챙겨 입었다. 분이 덜 풀린 종백이는 계속 "붙자! 붙자!" 하며  악을 썼지만 달려들지는 않았다. 돌아보니 녀석도 벗어 놓은 바지를 챙겨 입고 나를 따라오고 있었다. 그런데 좁은 솔밭길을 걸어 나왔을 때, 우리 학교 뺏지를 단 학생과 마주쳤다. 3학년 선배였다. 그 학생은 한눈에 우리들의 상황을 눈치챘다. 종백이는 그나마 팬티 차림으로 싸운 덕분에 교복 바지가 말짱했지만, 모래밭을 뒹군 내 바지는 거의 걸레 수준이었다. 그 학생은 그냥 지나칠 듯하더니, 우리를 불러 세우고 몇 반이냐고 물었다. 내가 대답하자 그는 짧게 한 마디 던지고 돌아섰다.

“내일 아침에 3학년 7반 교실로 와! 알았나!”     


다음 날 아침, 우리는 3학년 7반 교실 문을 열었다. 호랑이 소굴 같았다. 덩치 큰 호랑이들이 우리를 쳐다보았다. 교실 저쪽에서 어제 그 학생이 손짓을 하였다. 종백이와 나는 몸을 한껏 낮추고 ‘우리는 서로 화해하였으며 이제 사이좋게 지내기로 했다.’라고 입에 발린 소리를 하였다. 다행히 별 다른 괴롭힘을 주지 않았다. 대신 “한 번만  더 싸우다가 걸리면 죽는다” 고 경고하고 우리를 놓아주었다.       


그런데 옆에서 지켜보던 또 다른 3학년이 우리를 붙잡아 놓고 이러쿵저러쿵 훈계를 하였다. 그러고 나면 또 다른 3학년이 기다렸다는 듯 우리를 세워놓고 학교의 명예가 어떻니 하면서 겁을 주었다. 이른바 후배 길들이기 뺑뺑이였다. 우리는 개밥 속 도토리처럼 여기저기 굴러다니다가, 제일 뒷자리에 앉은 덩치가 큰 학생 앞에 섰다. 인상이 험상궂게 생긴 그 학생을 보니 무서워서 울고 싶었다. 그런데 깡패처럼 생긴 그 학생이 뭔가 말하려고 입을 달싹이는 순간, 어디서 벼락같은 고함 소리가 들렀다.   

“야! 이 자슥들아! 지금 머 하는 짓이고!”


갑작스러운 고함소리에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려보니, 창가 쪽 중간자리쯤에 누가 일어서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선생님이 아니었다. 키가 중간쯤 되고 다부져 보이는 학생이었다. 교실은 삽시간에 물 끼얹듯 조용해졌다. 그는 같은 반 친구를 둘러보며 소리쳤다.

“‘쪽팔리게 1학년을 데리고 노는 것이 3학년이 할 짓이가!”     


목소리가 쩌렁쩌렁했다. 아무도 나서서 맞서지 않았다. 40명이 넘는 학생들은 그 선배의 강렬한 눈빛과 단호한 표정에 압도당하는 것 같았다. 우락부락한 학생도 잠시 난감해하더니 순순히 우리를 보내주었다. 종백이와 나는 숨을 죽이고 교실을 빠져나왔다.


그날 고수를 보았다. 진정한 싸움꾼은 진흙탕 속에서 눈부셨다. 정의의 이름으로 빛나는 그 위풍당당함에 하수들은 꼬리를 내렸다. 또한 고수는 상대를 섣불리 제압하려는 들지 않았다. 정곡을 찌르는 한 마디로 혼란을 평정하고 하수로 하여금 스스로 과오를 알게 하는 카리스마가 있었다.      


3학년 7반 교실에서 죽다가 살아난 우리는 그 후 생활태도가 달라졌다. 종백이 아무에게나 건들거리지 않았고 섣불리 도전장을 내밀지 않았다. 나도 남을 함부로 째려보지 않았다. 그리고 그날 이후 단 한 번도 야만스러운 주먹질을 하지 않고 그야말로 ‘차카게’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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