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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형식 Nov 03. 2021

여우와 신포도

미남, 그것 아무 짝에도 쓸모없습니다.


어느 날, 여우 한 마리가 길을 가다가 높은 가지에 매달린 포도를 보았다.

“참 맛있겠다.”

여우는 포도를 먹고 싶어서 펄쩍 뛰었다. 하지만 포도가 너무 높이 달려 있어서 발에 닿지 않았다. 여우는 다시 한번 힘껏 뛰어 보았다. 그러나 여전히 포도에 여우 발이 닿지 않았다. <이솝 이야기>


‘선생 똥은 개도 안 먹는다’는 속설이 있지요. 지당한 말씀입니다. 하루 종일 개구쟁이 등살에 속이 상할 대로 상해 나온 것이니 지나가던 견공이 피해 갈 법도 합니다. ‘초등학교 선생님들은 쩨쩨하다’는 말 또한 일리가 있습니다. 온종일 철부지들 속에서 아옹다옹 살다 보면 나도 모르게 아이 수준이 된 자신을 발견하고 깜짝깜짝 놀랍니다. 


1학년 담임을 맡으면 1학년 수준이 되고 6학년 담임을 맡으면 6학년 수준이 된다는 말이 괜한 말이 아닙니다. 나는 올해 4학년 수준으로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요즘 우리 반 녀석들이 아주 드러내 놓고 나더러 ‘늙었다’고 합니다. ‘못생겼다.’ ‘할배 같다.’ ‘늙었다.’ 이런 말이 얼마나 치명적인 아픔을 주는지, 열한 살 인생들이 알 턱이 있겠습니까. 다 옆반 선생님들이 때문입니다. 나만 빼고 모두 젊은 선남선녀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아이들에게 '자세히 봐라. 너희 담임 선생님 아직 젊다'라고 반복해서 주입합니다.     


오늘도 여느 날과 다름없이, 교실에는 일기나 숙제를 안 해온 개구쟁이들이 남았습니다.  그런데 요 녀석들이 제 할 일은 안 하고 선생님 앞에서 콩닥콩닥 잡담만 늘어놓고 있었습니다. 보다 못해 내가 “어이, 꼬마들 빨리 숙제하고 집에 가시지” 그랬더니 녀석들이 못 들은 척 대꾸도 하지 않습니다. 꼬마들은 꼬마라는 호칭을 엄청 싫어합니다. 그래서 다시 한번.     

 “어이, 미남들 빨리 숙제 안 할 거야!”

그랬더니 째깍 반응이 옵니다. 일명 빠박이 성흠이가 씨익 웃으며 말합니다.

“우리 중에서 누가 제일 미남인데요?”


대답해 주려고 올망졸망 앉아 있는 꼬마들의 얼굴을 비교 관찰하였습니다. 나름 귀엽기는 하지만, 솔직히 말해 미남이라 할 수 없는 도토리 같은 얼굴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상처 받지 않게 살짝 농담을 섞어 정직하게 말해주었지요.

“일단 선생님이 제일 미남이고 너희들은 잘 모르겠다.”     


그런데 내 말을 들은 꼬마들의 반응이 갖가지입니다. 지태는 ‘나는 뭐 원래 미남도 아닐 뿐이고’라고 중얼거리고,  동영이는 무슨 생각을 했는지 저 혼자 비시시 웃고, 동승이는 빨리 일기 쓰고 축구하러 가야 한다는 일념으로 책상에 코를 박고 있습니다. 하지만 단 한 명, 아까 질문했던 빠박이가 딴지를 겁니다.

“그래도 우리는 안 늙었잖아요.”     

요 녀석이 기어코 민감한 내 나이를 들먹여 반격을 합니다.

“뭐라고! 내가 어디가 늙었냐? 쨔샤!”


뚜껑에서 슬슬 김이 솟습니다. 그렇지만 더 이상 쫀쫀하게 따지다가는 나만 손해입니다. 그래서 미남의 품위와 교사의 체면을 유지하기 위해서 참습니다. 농담 끝에 분위기는 싸늘해지고 아이들 연필 소리만 사각사각 들립니다. 꼬마들은 아무렇지 않은데 나 혼자 외톨이처럼 심각해집니다. 이렇듯 요즘 나는 체중 30kg 남짓하고 신장 약 130cm 정도 되는 꼬맹이들 때문에 가끔 토라집니다.  


이제 믿을 사람은 나 밖에 없습니다. 스스로 치유해야 됩니다. 나는 아이들 등 뒤를 돌아서 교실 뒤편에 있는 벽걸이 거울 앞으로 갑니다. 옆으로 서서 표시 나지 않게 슬쩍 거울 속 나를 쳐다봅니다. 거울 속에 중늙은이 가 나를 바라봅니다. 아랫배에 약간 힘을 주고 손가락으로 머리를 옆으로 쓸어 넘겨 봐도 더 이상 미남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래도 사람은 괜찮아 보입니다. 내가 선생님을 오래 해봐서 아는데요. 미남, 그것 아무 짝에도 쓸모없습니다.


<이솝 이야기>

여우는 포도나무를 향해 몇 번을 뛰어 보았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결국 포도를 따 먹지 못한 여우가 돌아가면서 말했다.

“저 포도는 너무 시어서 맛이 없을 거야.”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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