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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형식 Dec 06. 2021

미궁에 관하여

오늘 밤 미궁에 드셔 보실까요?

비 오는 날이면 아이들은 무서운 이야기에 목이 마르다.  아침부터 비가 내렸다. 주현이가 틈을 놓치지 않고 무서운 이야기를 해달란다. 이번에는 아예 맡겨놓은 물건 달라하듯 구체적으로 '귀신 노래'를 들려 달라고 주문했다. 요즘 인터넷에서 '귀신 노래' 때문에 난리가 났다고 설레발을 쳤다. 흥! 어림 반 푼 어치도 없는 소리. 어디 말도 안 되는 수작으로 첫 시간부터 농땡이를 피울라고? 나는 코웃음 쳤다. 자, 책 펴라. 공부하자.  


오후가 되자 비가 더 세차게 내렸다. 그런데 아까 그 찐드기 녀석이 또다시 달라붙었다. '귀신 노래'는 집에 가서 들어도 되는데, 너무 무서워서 혼자서는 못 듣겠다는 것이다. 만약 오늘 친구들과 같이 듣게 해 주시면, 선생님 말씀을 잘 듣고 어쩌고 저쩌고 하면서 칭얼댔다. 하지만 세상에 공짜가 없는 법. 나는 조건을 제시해 주었다. 

"좋다! 그러면 어제 음악시간에 배운 둥당기타령을 멋지게 불러봐라. 그렇다면 기회를 주마."


열세 살 변성기 남학생의 취약점을 간파한 고난도 과제였다. 그런데 웬 일로 숙맥이 선뜻 앞으로 나왔다. 그리고 오로지 인터넷 '귀신 노래'를 듣겠다는 일념으로 꺼이꺼이 노래를 했다. 혼자 보기 아까운 통곡 같은 노래. 나는 저으기 실망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이도 스스로도 이건 아니다 싶었는지 조용히 제자리로 들어갔다. 


그런데 또 다른 도전자들이 나타났다. 이번에는 삼중창으로 제대로 불러보겠단다. 녀석들이 인해전술로  고래고래 돼지 멱따는 소리를 질러댔다. 하지만 역시 '아니올시다'였다. 노래를 듣고 있던 내 가슴이 그야말로 '둥당기' 소리를 내며 무너졌다. 그런데 이게 웬일? 엉망진창 삼중창이 끝나자마자 우레와 같은 함성과 박수가 터져 나왔다. 이 녀석들이 어디서 짜고 치는 고스톱? 기가 차서 말이 안나지만, 한편으로는 '귀신 노래' 정체가 좀 궁금했다.


떼쟁이를 불러내어 교사용 컴퓨터에서 문제의 노래를 검색할 수 있게 했다. 책상 앞에 앉은 녀석이 침을 꼴깍 삼키면서 자판을 두드렸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아이들 표정이 각양각색이었다. 신경을 곤두세우고 노래가 흘러나오길 학수고대하는 아이. 미리 겁을 먹고 두 손으로 귀 막고 눈을 찔끔 감는 아이. 입으로는 "우리 그 딴 것 듣지 말아요!" 하면서도 눈은 간절히 귀신 노래를 갈구하는 아이.


"맞제? 맞나?"

마침내 저희들끼리 무언가를 찾아놓고 긴가민가하고 있었다. 내가 고개를 빼고 힐끗 보니 검색어가 '미궁'이었다. 오호라, 황병기 가야금! 나는 순식간에 '귀신 노래'의 정체를 파악했다. 아직 그 곡은 듣지 못했지만, 신문에서 익히 들은 바가 있었다. 그러나 아이들은 자신들이 바라던 '귀신 노래'를 코 앞에 두고 "이게 아닌 것 같다." 하며 뒤통수를 긁고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애가 달은 아이들이 한 마디씩 하였다.

"그 노래 듣는 사람은 몸이 점점 굳어진다 하던대요."

"여자 귀신 울음소리가 나와서 귀신 노래라 하던데."

"살 째지는 소리도 나온다 하더라."


나는 도탄에 빠진 백성을 구하는 사또 마음으로, 칠판에다가 큼지막하게 '유언비어'라고 썼다. 그리고 말없이 컴퓨터에 앉아, 황병기와 미궁을 검색해서 보여주었다. 유언비어의 증거가 교실  텔레비전에 둥실 떠올랐다. 

- 황병기: 국악 연주가. 1936년 5월 31일 서울 출생. 이화여대 교수, 하버드대 초청 교수, 가야금의 명인

- 미궁: 1975년 초연된 곡으로 가야금과 사람 목소리로 연주. 전위적인 작품으로 곡의 구성뿐만 아니라, 연주에 있어서도 가야금을 바이올린 활을 이용해 아쟁처럼 연주하는 등 새로운 시도가 돋보이는 명작  


나는 짧은 지식을 동원하여 귀신 노래와 미궁의 상관관계를 알려 주었다.

"애들아, 예술하는 사람들은 늘 새로운 도전을 한다더라. 다른 사람이 하던 방법을 말고 자기 고집대로 새로운 방법으로 세상에 하나뿐인 작품을 만들고 싶어 한다더라. 귀신 노래가 아니라 우리 가야금으로 만든 세계적인 명작이라 하지 않냐. 명작!"


나는 녹즙기 홍보사원처럼 말했지만, 나 자신도 잘 모르는 말을 대충 하고 넘기는 것 같아 약간 민망했다. 눈치 빠른 아이들도 자신감 없는 선생님 말을 믿지 않고 의문을 제기했다.

"샘! 그 노래 만든 사람은 그다음 날 바로 죽었다던대요?"

"황병기라는 아저씨 지금도 살아 있습니까?"


내 친구 최병기는 잘 살고 있지만, 황병기 교수는 모르겠다. 하지만 이러쿵저러쿵 말이 필요 없다. 일단 곡을 들어보기로 했다. 그런데 시작부터 음악이 범상치 않았다. 재생 버튼을 누르고 약 4분 가까이 여자 목소리로  "우   우   우   우~" 웅얼거리는듯한 소리만 나왔다. 처음에는 평이하던 소리가 점차 떨리더니 울음 같은 소리로 바뀌었다. 그리고 간드러진 여자 웃음소리와 남자의 헛웃음 같은 소리가 섞여 나왔다. 소름이 돋았다.

"애들아, 안 되겠다. 우리들이 듣기에 어려운 음악이야. 너무 실험적이야!"

아무래도 아이들한테 정서적으로 좋지 않을 것 같았다. 나는 얼른 영상 정지 버튼을 눌렀다. 때맞춰 수업을 마치는 종이 울렸다. 


그날 아이들이 모두 하교한 뒤 '미궁'을 들어보았다. 이번에도 다 듣지 못하고 10분이 경과할 즈음 정지 버튼을 눌렀다. 창밖에 세차게 비 내리고 어둑신해진 교실에 혼자 있었던 탓만은 아니다. 새로운 시도, 현대 음악, 전위적 예술 이런 단어들이 기괴한 음악과 함께 혼란스러웠다. 


공자님 말씀을 영양가 있게 풀어 주시는 어느 선생님의 글 중에서 이런 내용이 있었다. "알기만 하고 좋아하지 못하면, 이는 앎이 지극하지 못한 것이요. 좋아하기만 하고 즐거워함에 미치지 못한다면, 이는 좋아함이 지극하지 못한 것이다."


황병기 교수의 가야금 산조 미궁은 인간의 희로애락을 표현하고, 깨달음을 얻어 피안으로 가자는 것이 주제라고 한다. 나로서는 백번쯤 들어야 겨우 발꿈치에나 닿을 수 있는 것 같았다. 아직 앎이 지극하지 못하여 '미궁'에 빠져 들지 못한 것이다. 


그러니 애당초 아이들의 소박한 느낌을 알량한 지식으로 함부로 재단할 일이 아니었다. 나는 귀신 노래와 공자님 덕분에 제대로 배우는 일이 중요한 일임을 깨달았다. 물론 이것은 '미궁'을 들어 본 극히 주관적인 내 생각에 근거한 의견이다. 자, 이제 여러분에 기회를 드리고 싶다. 어떻게? 오늘 밤 미궁에 한번 드셔 보실랑가요? 


https://youtu.be/PkJSOEI9l-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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