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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형식 Nov 22. 2021

고하분교장  

그 학교 아이들은 어디로 갔을까.

버스가 헉헉대며 산비탈을 오르면, 저 멀리 내려다보이는 들판에 그 동네가 있다. 그 시절 고등학생이었던 나는 차창 너머 우연히 눈에 띈 그 동네 정경에 눈을 빼앗겼다. 내가 시골 촌놈인데도 불구하고 그곳에 가서 살고 싶을 정도로 정겹고 단아한 동네였다.     


마을이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산자락 아래 집들이 어미 닭 품 속 병아리처럼 옹기종기 모여 있고, 마을 앞에는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을 만큼 곡식이 익는 들판이 펼쳐졌다. 그리고 작은 예배당과 국민학교와 반듯한 운동장. 자연과 사람과 문화가 제 자리에서 소박하게 자리 잡고 있는 평화스러운 동네였다.      


집을 떠나 도시에서 자취하던 나는 매주 고향을 오갈 때마다, 버스가 스쳐 가는 동안 잠깐 볼 수 있는 그 풍경에 매료되었다. 내가 만약 그 동네에 산다면 저절로 행복질 것 같았다. 그러나 얼마 안 있어 4차선 고속도로가 새로 뚫리고 버스도 예전처럼 굼뜨지 않고 바람처럼 스쳐 갔기에, 그림 같던 그 동네도 내 기억 속에서 차츰 희미해졌다.      

 

그런데 많은 세월이 흐른 어느 해, 내가 거짓말처럼 그 마을에 살고 있었다. 하지만 처음에는  몰랐다. 도시에서 시골로 발령을 받아 그 학교 사택에 이삿짐을 내릴 때까지, 그곳이 예전에 학창 시절에 내 눈을 뺏던 그 동네인 줄 몰랐다. 야트막한 산자락에서 곱게 이어진 들판 그리고 작은 학교와 반듯한 운동장과 예배당이 있는 마을. 나도 모르는 사이 예전에 꿈꾸던 마을 품에 안겨 있었던 것이다.  

   

한때는 면 중심 학교였던 그 학교가, 내가 부임했을 때는 4 학급 규모의 분교장으로 격하되어 있었다. 부임하고 나흘 뒤 입학식이 열렸다. 일곱 명 신입생을 환영하는 자리에는 학부모뿐만 아니라 동네 사람들이 참석하는 바람에 오랜만에 운동장이 떠들썩했다. 옛날에 이 학교를 지을 때 십시일반 모금을 하여 학교 용지를 기부한 어르신들도 오셨다. 노인들과 학부모들은 입학생 수가 지난해보다 늘어난 것과 젊은 교사가 자녀들을 데리고 사택에 와서 생활하는 것을 무척 기뻐하였다.     


그리고 그해 삼월, 나는 내 교직 생활에서 두 번 다시 보지 못한 감동적인 장면을 보게 되었다. 한참 수업을 하고 있는데 밖에서 요란한 기계 소리가 들렸다. 창가로 가서 운동장을 내려다보니 경운기들이 줄줄이 교문을 들어서고 있었다. 마을 주민들이 몰고 온 경운기였다. 그분들은 근처 냇가에서 흙을 실어 와서, 울퉁불퉁 갈라진 운동장을 메워 주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젊은 사람들은 경운기로 흙을 실어 나르고, 어르신들은 농기구로 흙을 고르게 펴는 작업을 하였다. 나는 아이들과 함께 창문 가에 붙어 서서 한참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아이들의 책 읽는 소리와 경운기 소음이 묘한 화음으로 들렸다. 하지만 가슴이 더욱 뭉클했던 것은 다음 날이었다.     


아침부터 옆구리에 세숫대야를 낀 할머니들이 아이들처럼 학교에 등교하셨다. 할머니들은 머릿수건을 두르고 운동장에 쪼그려 앉아 운동장에 널린 자잘한 돌멩이들을 주워 담았다. 냇가에서 실어 온 흙이라서 잔돌이 많았기 때문이다. 할머니들은 며칠 동안 앉은뱅이걸음으로 일일이 잔돌을 골라 세숫대야에 담아내셨다.     


소규모 학교에 대한 폐교 소식이 심심찮게 들려오던 때였다. 폐교 대상이 된 학교에는 알게 모르게 시설 지원이 소홀했고, 자꾸만 낡아 가는 학교를 위해 동네 사람들은 그렇게 나선 것이다. 나는 교육청 장학사에게 내가 본 광경을 그대로를 전하였다. 학구민들이 학교를 사랑하는 마을을 알아주시고, 최소한 교육활동은 지장이 없도록 지원 해주기를 바랐다.      


그해 여름방학을 앞둔 어느 날, 학교 운동장에 모래를 실은 덤프트럭이 들이닥쳤다. 교육청 예산지원이 떨어진 것이다. 운동장 곳곳에 산더미 같은 모래가 쌓여 있었다. 잔돌이 섞인 흙이 아니라 고운 금빛 모래였다. 내 집 앞에 쌀가마가 쌓인 들 그렇게 반가울까 싶었다.      


다음날, 소식을 듣고 달려온 마을 사람들과 학교 교직원들이 힘을 합해 운동장에 쌓여 있는 모래 고르기에 나섰다. 모두 기쁜 마음으로 땀을 흘렸지만, 그 많은 모래를 평평하게 만드는 일이 간단치 않았다. 그때 동네에서 식당을 하는 학부모 한 분이 꾀를 냈다. 트럭 뒤에 무거운 철제빔을 가로로 매달아 이리저리 끌고 다니며 모래를 고르는 방법이었다.      


그날 기막힌 장면은 이랬다. 맨 앞에 일 톤 트럭이 철제빔을 매달고 운동장을 빙빙 돌고, 철없는 아이들이 그 뒤를 좋아라 하며 뒤쫓아갔다. 놀란 교사들이 철부지들 말리려 아이들 뒤를 따라다녔다. 그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학교 앞을 지나다니던 도로 공사 차가 본 모양이었다. 마을 인근에서 도로포장 공사하던 차였다. 기사님들은 차 세워 놓고 구경하다가, 잠깐 기다려보라고 하더니, 얼마 안 있어 공사용 특수차를 몰고 운동장에 들어왔다.     


먼저 땅 고르는 차가 보란 듯이 작업을 시작했다. 그 큰 차가 운동장을 몇 바퀴 돌자 삽시간에 운동장이 방바닥처럼 평평해졌다. 그것뿐만 아니었다. 땅 고르는 차가 멋들어지게 시범을 보이고 물러나자, 이번에는 땅 다지는 차가 입장했다. 육중한 바퀴가 달린 특수차가 운동장을 몇 바퀴 순회했다. 그랬더니 시골학교 운동장은 올림픽 경기장처럼 깔끔하고 멋있게 변했다.    

  

아이들은 황금 카펫을 깔아 놓은 듯한 운동장에서 환호성을 지르며 뛰어다녔다. 나도 벅찬 감동으로 동네 가게로 달려가 담배와 음료수와 막걸리를 사서, 하늘에서 홀연 나타난 것 같은 흑기사님을 대접했다. 그리고 동네 사람들과 운동장 한편에 자리를 펴고 땅거미가 질 때까지 막걸리 잔을 기울였다. 


나는 그 학교에서 4년을 근무하다가 도시로 전근을 갔다. 그리고 5년 만에 다시 시골로 돌아왔다. 하지만 그 학교로 돌아갈 수가 없었다. 단정한 2층짜리 본관과 오래된 음악당 그리고 동화 같은 이야기가 있는 운동장도 그대로 였지만 아이들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고하분교장은 내가 돌아오기 한 해 전에 폐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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