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원을 펼치는 것과 접는 것에 대하여
겨울방학이 가까워졌다. 방학식 할 때까지 오전 수업이다. 열세 살 인생들은 문을 열고 들판으로 뛰쳐나가려는 염소처럼 흥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선생님은 바쁘다. 그날도 학년 말 잡무와 성적처리로 눈코 뜰 새가 없는데, 녀석들은 수업을 마쳤는데도 냉큼 교실을 떠나지 않고 시끌벅적 훼방을 놓고 있었다.
“선생님!”
나는 못 들은 척 책상에 코를 박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잠시 후 또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선생님?”
이번에는 쳐다보지 않았지만 건성으로 대답해 주었다.
"듣고 있다. 말해라."
그런데 쓰다 달다 말이 없다. 나도 뭐 별 중요한 일이 아닌가 보다 하고 돌부처처럼 내 할 일만 했다.
그런데 조금 있다가 또 "선생님!"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이놈들이 왜 이리 눈치 없지 약간 거슬렸다. 나는 정말 눈코 뜰 새가 없었다. 그래서 모니터에 눈을 떼지 않고 낮은 목소리로 경고했다.
"선생님 바쁘다. 장난치지 마라.”
”선생님, 사랑해요. “
응? 사랑? 애들이 갑자기 왜 이러나? 점심을 잘못 먹었나? 뚱딴지같은 소리에 번쩍 고개를 들고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이게 웬일? 아이들은 아무도 날 쳐다보지 않았다. 저희들끼리 휴대폰 하나를 둘러싸고 열심히 수다를 떨고 있었다. 그러니까 지금까지 나한테 하는 말이 아니라 휴대폰 속 인물한테 한 말이었다. 주인공은 바로 지난주에 우리 교실에 왔던 교생 선생님. 아이들은 휴대폰 선생님에게 아낌없는 구애를 표현했다.
"선생님, 사랑해요"
"선생님, 보고 싶어요. 잉잉"
”선생님, 우리 교실에 언제 오실 거예요? “
에라이! 나는 벌떡 일어나 교사 휴게실로 와서 벌컥벌컥 냉수를 들이켰다. 젊은 교생 선생님들이 와 있는 일주일 동안 내 인기는 그렇게 추락했다. 찬물을 들이켜니 정신이 들었다. 이대로는 안된다. 예전에 인기를 다시 회복해야 찾아야 한다.
다음날 아침, 나는 우리 반 아이들한테 쪽지를 나누어주고, 각자 바라는 소원을 적어라고 했다. 무엇이든 좋다. 선생님이 들어줄 수 있는 소원이라면 당연히 들어줄 것이고, 부모님이 해 줄 수 있는 소원이라면 너희들 대신 부탁드릴 용의도 있다고 했다. 아이들이 '웬일?' 하는 표정을 짓더니, 긴가민가 소원을 적어 냈다.
. 옆 짝꿍은 여자끼리 앉고 싶어요.
. 선생님들이 다니는 중앙 현관으로 다니고 싶다.
. 일주일에 하루만이라도 우유에 제티를 타 먹게 해 주세요.
. 수업 시간에 교실 바닥에 누워 잠자기.
. 언제 한번 학교에서 함께 컵라면 끓여 먹어용.
. 나 혼자 칠판을 예쁘게 꾸며 친구에게 보여주고 싶어요.
. 쉬는 시간에 선생님하고 축구하고 싶습니다.
. 선생님 식빵 복근 보여주세요.
나는 칭찬 쿠폰을 팍팍 풀고, 그것을 빌미로 우리 반 아이들 소원을 거의 다 들어주었다. 다만 식빵 복근은 아직 많이 부풀어 있는 상태라 차마 보여주지 못했다. 어쨌든 바닥을 기던 내 인기가 차츰 회복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유리가 자기는 저번에 소원을 적어내지 못했다면서, 이루고 싶은 소원이 두 개가 있다고 했다. 유효기간이 만료되었지만 아이의 바람을 야박하게 거절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유리는 아침 일찍 등교해서 교실 모든 창문을 활짝 열어 주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멀리서 운동장을 걸어 들어오는 나를 보면, 두 팔을 올려 커다란 하트를 덤으로 보내 주었다. 그러니 당연히 보상을 할만했다.
”그래, 니 소원을 말해 봐라. “
”하나는 골마루 이쪽에서 골마루 저쪽 끝까지 신나게 달려 보는 것이고요. 또 하나는 선생님하고 ‘야자 타임’ 해보는 거예요. “
어랍쇼. 맹랑한 녀석이다. 하지만 그 엉뚱함이 재미있었다. 나는 당장 소원 하나를 들어주었다. 다음 날 이른 아침, 나는 1층에서 현관에서 망을 봐주고, 유리는 아무도 없는 4층 긴 골마루 자유롭게 달렸다. 그렇지만 야자타임은 망설여졌다.
왜 굳이 야자타임을 하고 싶은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아동기와 사춘기 사이에 걸터앉은 열세 살 청춘의 반항심 같은 것일까. 항상 일정한 선 밖에 있는 선생님과 친구처럼 더 가깝게 하고 싶다는 표현일까. 아니면 아주 어릴 때, 누구에게나 반말을 하며 말을 배우던 시절 어리광 같은 것일까. 혹시 그렇다 하더라도 내가 그 낯선 대화를 자연스럽게 할 수 있을까.
그러나 약속을 했으니 지키야 한다. 생각해보면 교사와 학생 간 대화는 항상 높임말과 낮춤말로 일방적이긴 하다. 까짓 야자타임 한번 한다고 교실이 뒤집어질 일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하기 싫은 숙제처럼 차일피일 미루었다.
졸업이 얼마 남지 않는 어느 날, 체육시간만 되면 몸이 아프다는 핑계로, 나무 밑에서 수다를 떨고 있는 여학생 일당 속에 유리가 있었다. 나는 그 옆에 앉아 심드렁하게 말했다.
”유리야, 이제 졸업 기념으로 두 번째 소원을 풀어 보자. “
느닷없는 제안인데도 유리도 놀라지 않고 웃어 보였다. 옆에서 보고 있는 촉새 무리들이 신이 나서 박수를 쳤다. 촉새들은 이미 모든 정보를 다 꿰뚫고 있었다.
"해봐! 해봐!"
유리와 내가 눈치게임을 듯 마주 앉았다. 막상 시작을 하니 내게 무척 유리한 게임이었다. 나는 평소처럼 말했다.
"유리야."
아이는 대답을 않고 가만히 있었다. 아이 머릿속에 맴도는 온갖 반말들이 내 머리에 떠올랐다. 이제 내가 당할 차례다. 나는 한번 더 부추겼다.
"유리야. 요즘 너 고민 있냐?"
그런데 나를 향해 뗄 듯 말 듯 망설이던 입술에서 까르르 웃음이 터져 나왔다.
"우스워서 안 되겠어요. 다음에 마음의 준비가 단단히 되면 할게요."
유리는 자꾸 웃었고 촉새들이 뭐라 뭐라 항의했다. 나는 얼른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리고 죽자살자 축구공 하나를 따라다니는 남학생들 속으로 뛰어갔다.
아이는 두 가지 소원이 있었다. 하나는 아주 신나게 펼쳤고 다른 하나는 스스로 접었다. 맞다. 소원을 꼭 이루어야 행복한 것은 아니다. 때로는 쿨 하게 접어도 괜찮다. 마치 종이비행기를 접어 하늘로 날려 보내듯 마음을 비우는 일. 유리는 그것을 아는 것 같았다. 그래서 선생님에게 낸 숙제를 면제해주었고, 덕분에 나는 혼돈에서 해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