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형식 Dec 04. 2021

박하사탕

인내가 맺은 열매의 그 시원하고 달콤한 맛

어린 시절,  ‘인내는 쓰다. 그러나 그 열매는 달다.’라는 명언을 처음 읽었을 때, 나는  ‘인내’라는 과일이 진짜 있는 줄 알았다. 쓰기도 하고 달기도 하다? 다음에 커서 돈 벌면 그 요상한 과일을 꼭 사 먹어 보리라 결심했다. 그런데 감사하게도 내가 중학생 되자마자, 신(神)은  ‘옜다! 네가 바라는 인내다.’ 하고 인내를 주셨다. 그 맛은 이랬다.      


중학교 때 집안이 사정없이 기울어졌다. 그래서 아르바이트를 하였다. 나는 깊은 밤 자전거를 타고 읍내 기차역으로 갔다. 기차는 밤 열두 시에 플랫폼에 도착하였다. 열차가 정차하면 재빨리 수하물 칸으로 달려가서, 내일 아침에 배달될 신문 꾸러미를 내려받아 자전거에 옮겨 실었다. 그리고 신문보급소로 돌아와서 내일 아침 면지역 구독자들에게 보낼 신문에, 주소가 적힌 띠지를 끼워 다시 자전거를 타고 우체국에 실어 보냈다.       


그날 밤 추위는 혹독했다. 어둠이 내리자 찬바람은 읍내를 휘젓고 다녔고, 사람들은 일찌감치 문을 걸어 닫아걸었다. 춥고 어두운 밤길을 달렸다. 칼바람은 어리다고 사정을 봐주지 않았다. 손발이 얼고 귀가 떨어질 듯 아팠다. 나는 끝내 자전거를 세우고 아무도 없는 길에서 엉엉 울었다. 얼떨결에 처음 맛본 인내는 그렇게 매서웠다.   


공업고등학교 삼 학년 때, 대구 방직공장에 실습을 나갔다. 일만 열심히 하면 공장에서 먹는 것과 자는 것을 다 해결해주었다. 감사하고 행복했다. 그즈음 울산 조선소에 다니는 친구한테서 연락이 왔다. 기능직 사원 모집이 있어서, 담당과장님한테 잘 부탁해두었으니 빨리 오라는 것이다. 그곳은 방위산업체라서 5년을 근무하면 병역을 면제받을 수 있었다. 나는 다니던 방직공장을 그만두고 울산으로 갔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철석같이 믿었던 담당과장의 부름이 없었다. 결국 닭장 같은 친구 기숙사에서 꼬막 보름을 기다리다가 고향으로 내려왔다. 집안 사정은 여전히 좋지 않았다. 일자리를 찾아 이리저리 다녔지만, 자꾸 지쳐갔다. 어쩔 수 없이 전에 다니던 대구 방직공장 부장님께 사정을 전하였다. 다행히 회사에서 재입사를 허락해 주었다.   

   

옷 가방을 싸 들고 대구 가는 버스에 올랐다. 자존심도 상하고 신세도 처량하고... 왜 그리 눈물이 나던지... 다시 돈을 벌 수 있게 되었는데 왜 그리 서럽던지...  나는 차 안에서 고개를 떨군 채 소리를 나지 않게 꺽꺽 울었다. 쓰디쓴 두 번째 인내였다. 그 후에 있었던 세 번째 인내는 아직은 말하지 못하겠다. 대신 열매를 이야기하고 싶다.      

  

방직공장 담 너머에 국민학교가 있었다. 공장 소음을 막기 위해 담을 높이 쌓아 올렸고, 수많은 학교 창문은 늘 굳게 닫혀 있었다. 어느 날, 오전 작업을 끝내고 면장갑을 빨아 철제 구조물 널고 있었다. 그때 학교 창문 밖으로 아이들 얼굴이 보였다. 공장에 근무한 지 일 년이 넘었지만 아이들과 눈이 마주친 것은 그날이 처음이었다. 아이들도 이쪽 사람과 처음인 듯 잠깐 쳐다보더니 다람쥐처럼 사라졌다. 사랑스러웠다. 아! 내가 저런 아이들과 함께 지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는 구멍 난 면장갑을 햇빛에 널며 꿈꾸듯 중얼거렸다.       


그리고 12년 후 어느 날, 내가 시골 초등학교에서 부임 인사를 하고 있었다. 바다가 가까운 작은 학교, 올망졸망한 아이들이 바라보는 조그만 조회대에 올라가서 이렇게 말을 하고 있었다. 

“어린이 여러분 반갑습니다. 앞으로 여러분과 함께 공부할 최형식 선생님입니다.”      


젊은 날 공장 담벼락 아래서 꿈꾸었던 희망의 뱃머리가, 나도 모르는 사이 서서히 이쪽을 향하고 있었던 것이다. '신은 대체 얼마나 맛있는 열매를 주시려고, 이토록 오랜 세월 동안 쓰디쓴 인내를 맛보게 하실까' 하고 궁시렁거리던 어느 날, 불현듯 이 작은 학교 교정에 나를 내려놓았다.   

       

부임 첫날 아이들이 모두 하교한 뒤, 교실 창문을 활짝 열고 한껏 숨을 들이쉬었다. 어릴 때 박하사탕을 오드득 깨물었을 때처럼, 콧속에서부터 시작한 상쾌함이 온몸으로 퍼졌다. 인내가 맺은 열매는 달콤하고 시원한 박하사탕 맛이었다. 

이전 12화 축구 열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