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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형식 Dec 17. 2021

나비야, 청산 가자

도시 변두리 어느 허름한 밥집에서 

정월대보름 달집 타는 모습을 보면 ‘나비야, 청산 가자.’라는 노래 가락이 떠오른다.      


나비야 청산 가자. 

범나비야 너도 가자.

가다가 저물거든 꽃에서 자고 가자.

꽃이 푸대접하거든 잎에서 자고 가자.     


‘초저녁 달’이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어느 동네가 있었다. 지금은 대로가 뚫리고 대단위 아파트가 들어선 도회지가 되었지만, 20년 전에는 그 이름만큼이나 촌스러운 변두리 동네였다. 서적 외판원이었던 나는 가끔 그 동네에서 가판을 쳤다. 그날도 황량한 동네 골목골목을 누비며 다니다가 점심때가 되었다. 나는 길가에 있는 허름한 그 밥집으로 들어갔다. 


막걸리와 국밥 등 간단한 요깃거리를 파는 옛날 주막 같은 밥집이었다. 낡은 나무 대문을 열고 안을 들여다보니 아무도 없었다. 그때 만약 오십 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주인아줌마가 조금만 늦게 나왔더라면, 그냥 문을 닫고 다른 집을 찾았을 정도로 쓸쓸한 식당이었다. 주인아줌마는 내실 쪽에서 “아이고, 마수 손님 오시네”라고  말 하면서 손을 비비며 나왔다. 

 

아줌마는 얼른 내가 앉을 자리를 맨손으로 훔치며 앉기를 권하였다. 그녀는 약간 상기된 목소리로 주문을 받았고 나는 물국수 곱배기를 시켰다. 주방이랄 것 까지도 없는 좁은 공간에서 국수를 준비하면서, 아줌마가 이런저런 말을 걸어왔지만, 나는 그녀의 덧없는 수다스러움이 왠지 피곤해 건성으로 대답해 주었다.


잠시 후 내어 온 물국수를 앞에 놓고 막 젓가락을 들려던 순간, 바깥쪽에서 시끌벅적한 풍물소리가 들려왔다. 주인아줌마는 잰걸음으로 문간 쪽으로 가더니 소리 나는 쪽으로 목을 삐쭉 내밀었다. 

“아이쿠, 왔구나. 왔어” 

그녀는 혼자 중얼거리더니 갑자기 부산을 떨었다. 잘 정돈된 탁자와 의자를 새삼스레 다시 맞추고, 마른행주로 싹싹 소리가 나도록 닦았다. 그리고는 탁자마다 막걸리 주전자와 간단한 안주와 잔을 나르는 등 혼자 바빴다. 그리고 잠깐씩 동작을 멈추고 서서, 풍물 소리가 나는 쪽을 향해 귀를 세우고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풍물소리가 점점 더 크게 들려왔다. 아마 동네 풍물꾼들이 꽹과리를 앞세우고 집집이 돌아다니며 터를 다져주고, 주인은 술과 안주를 접대하는 그런 날이었나 보다. 풍물패는 아직 멀리 있는 것 같은데 신명 나는 장단이 작은 밥집 안에 점점 크게 들려왔다.    

   

들뜬 기분을 주체하지 못하고 안절부절못하는 주인아줌마의 모습이 재미있었다. 그녀는 손님은 이미 안중에 없는 듯, 벽면에 발라놓은 낡은 거울 앞에서 옷매무새를 다듬는가 하면, 풍물대가 오면 부조를 하려는 듯 지폐 몇 장을 꺼내 꼬깃꼬깃 허리춤에 넣었다.     

  

한껏 부푼 아줌마 모습과 드높아지는 장구 소리에 나도 덩달아 마음이 설레었다. 그래서 짐짓 모르는 척 천천히 수저질을 하며, 풍물패가 들이닥칠 때까지 기다리고 있다가, 그 흥겹고 신명 나는 놀이판 가운데 묻히고 싶었다. 풍물패는 마침내 바로 옆 가게에서 몰려들어 터를 다졌다.    

  

아줌마는 벌써 출입문 양쪽을 활짝 열어놓고, 한양 갔다 오시는 서방님 맞이하듯 빙긋빙긋 웃으며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 곧 형형색색 고깔을 쓴 사람들이 들이닥치리라. 나도 수저를 든 채 숨을 죽이고 문간 쪽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아! 그런데 옆 가게에서 터를 다지고 나오던 풍물패가 식당 문 밖에 언뜻 보이는가 싶더니, 아줌마가 서 있는 앞을 그냥 스쳐 지나고 있었다. 


그리고 요란한 풍물소리는 바로 다음 집에서 들려왔다. 나는 문 앞에서 돌아서던 아줌마의 표정을 잊을 수가 없다. 출입문에서 내실 쪽 의자까지 몇 발자국 걸어오는 동안, 아줌마 얼굴은 순간순간 변하고 있었다. 분노와 수모로 낯빛이 붉어지는가 싶더니, 이내 슬픔과 허탈함의 그림자가 차례로 그녀의 얼굴을 덮었다. 아줌마는 한쪽 다리를 곧추세운 자세로 의자에 걸터앉아 아무 말 없이 담배를 피웠다. 


국수 그릇을 비운 뒤 계산을 치르고 돌아설 때까지, 나는 그녀의 얼굴을 차마 바라볼 수가 없었다.  내가 그 낡은 밥집을 나왔을 때, 바로 옆 가게에는 여전히 동네 사람과 풍물패와 악기와 깃발이 어우러져 춤추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신명 나는 풍물 소리를 전혀 들을 수 없었다. 대신 환청처럼 옛 노랫가락이 아련히 들려왔다.

     

나비야 청산 가자. 

범나비야 너도 가자.

가다가 저물거든 꽃에서 자고 가자.

꽃에서 푸대접하거든 잎에서 자고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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