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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형식 Mar 15. 2022

들에 핀 장미화 1

나는 그것을 첫 사랑이라고 우겼다

들에 핀 장미화 1



며칠 전 여자아이가 전학을 왔다. 우리는 교무실에서 처음 만났다. 아이는 우리가 간단한 인사를 나누는 내내 아이는 뾰로통하게 앉아 있었다. 그리고 대화를 마치고 이제 우리 교실로 가보자고 아이한테 손을 내미는 순간, 그 크고 동그란 눈이 흐려지는가 싶더니 구슬 같은 눈물이 똑똑 흘렸다. 내가 당황해서 아이 엄마를 쳐다보자 '딸 아이가 마음이 너무 여리고 겁이 많아서' 그렇다며 양해를 구했다.      


흘깃흘깃 상황을 지켜보던 교감 선생님도 난감한지 짐짓 책상 위에 있는 서류만 뒤척이고 있었다. 나는 아이가 안정되면 데려오시라 하고 혼자 교실로 왔다. 얼마 후, 골마루 쪽 창문에 아이 엄마 모습이 보였다. 나는 얼른 교실 밖으로 나가 울음보가 터질 똥 말 똥한 꼬마 아가씨를 조심조심 모셔 교실로 들어왔다.    

  

하지만 창밖에 서 있는 제 엄마 모습이 사라지자 아이는 자꾸 눈물을 훔쳤다. 영악한 우리 반 꼬마들이 그걸 놓칠 리 없었다. 

"선생님 재 자꾸 울어요" 

요 녀석 조 녀석 돌아가면서 고자질을 해대는 바람에 수업할 분위기가 아니었다. 나는 책을 덮고 옛이야기 하나를 꺼냈다.


나는 어렸을 때 좀 불량스러웠다. 국민학교 2학년 때 찍은 사진을 보면 알 수 있다. 흑백 사진 속에는 젊고 고운 우리 엄마가 막내를 안고 있다. 누나와 동생과 내가 그 앞에 나란히 서 있는데, 내 모습이 참 볼만하다. 삐딱하게 짝다리를 짚고 서서 눈을 치뜨고 째려보는 표정이 세상 무서운 것 없는 하룻강아지 같다.    

  

일찍부터 공부 같은 것은 관심이 없었고, 매일 학교 운동장에 가서 주인 없는 개처럼 뛰어놀았다. 그렇게 놀다가 서산에 해가 걸리면, 소사 아저씨가 아이들을 운동장에서 내쫓았다. 소사 아저씨도 얼른 교문을 걸어 잠그고 퇴근을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네 형들과 나는 미꾸라지처럼  “♪ 소사 붕어알 달랑달랑♩”이라는 어구가 반복되는 노래를 부르며 달아났는데, 그 영악한 노래를 어디서 배웠는지 모르겠다.      


콩알만 한 녀석들이 얼마나 괘씸했을까. 소사 아저씨도 참지 못하고 옮겨 쓰기도 민망한 욕설을 우리를 향해 퍼부었다. 아이들은 뭐든지 어른보다 빨리 잊는 법. 며칠 후 우리는 그 일을 까맣게 잊고 놀다가, 소사 아저씨한테 붙잡혀 개 맞듯이 두드려 맞았다. 하지만 그렇게 맞고도 집에 가서 아무 말도 못 했다. 말해봐야 까불다가 잘 맞았다고 부모님께 또 야단맞을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바닷바람 드센 남쪽 지방에서 나는 그렇게 자랐다.        


그런데 어느 날, 나는 졸지에 서울내기가 되었다. 2학년 때 갑자기 서울로 이사를 오게 된 것이다. 엄마 손을 잡고 서울 충무국민학교 정문을 들어서던 나는 더 이상 코흘리개 개구쟁이가  아니었다. 엄마는 나를 달걀보다 더 반들반들하게 씻기고, 세련된 아동복을 사 입혀서 부잣집 아들처럼 꾸며 주셨다. 그 정성이 통했는지 어쨌는지 선생님도 무지렁이 촌놈을 반에서 제일 예쁘고 공부 잘하는 여학생 옆자리에 앉혀 주었다. 하지만 담임 선생님 배려는 내가 아무 말하지 않고 입을 다물고 있던 시간까지만 유효했다. 내 수준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기는 단 하루도 걸리지 않았다. 


그 시절 내가 사는 곳에서 서울까지 가려면 기차로 짧게는 8시간, 길게는 12시간 넘게 걸렸다. 생활 수준도 시골과 서울이 엄청 차이가 났다. 전학 첫날, 쉬는 시간에 아이들이 다가와 말을 붙였다. 이상했다. 분명히 우리나라 말인데 도무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예를 들면 나를 두고 저희들끼리 나누는 대화는 이런 식이다. 

“쟤한테 말 불쳤걸랑 근데 쫌따른과야 너어무 이상해여 그치?

서울말은 빠르고 유려해서 마치 노래를 듣는 것 같았다. 그에 비해 내 사투리는 너무 투박하고 밋밋했다. 서울 아이와 내가 나누는 대화는 대충 이랬다.

“머라카노?”

“머라카가 뭐야? 말해봐! 빨랑 빨랑!”

“빨랑이 머꼬?”

“머꼬은 또 뭐야. 아유 증말 웃겨 호호호호!”   


국어 시간이었다. 선생님이 나를 호명하더니, 국어책 배울 부분을 읽어보라고 하셨다. 나는 그때까지 놀기에 바빠 아직 받침 있는 글자를 아직 다 깨치지 못했다.  

“어머니...심부르..가씀미다.....상저에는무...거드..마나슴미다.”

(어미니 심부름을 갔습니다. 상점에는 물건들이 많았습니다.)     

듣고 있는 사람들이 답답해서 복장이 터질 지경이었다. 내가 미처 세 문장을 다 읽기도 전에 선생님은 됐으니 그만 앉으라고 했다. 당달봉사 개울물 건너듯 더듬더듬 책을 읽는 내 수준은, 운율과 박자를 살려 또박또박 읽는 서울 아이들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다음 날, 선생님은 우리 반에서 제일 예쁜 짝꿍 옆에 앉았던 나를 다른 자리로 바꾸어 버렸다. 내 흑역사가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하루 만에 바뀐 새 짝꿍은 안경 속에 눈꼬리가 위로 치켜 올라간 여자아이였다. 그 아이는 촌닭과 짝이 된 것을  무척 억울해하는 듯했다. 그래서 책상 가운데 38선을 그어놓고 확실하게 경계를 하였다. 만약  내 책이나 공책이 선을 넘어가면 사정없이 줄을 좍 그었다. 어쩌다 손이 넘어가도 봐주는 법이 없었다. 사정없이 손등 위에 금을 그었다. 

“이 가시나! 칵 고마!”     

주먹을 치켜들고 억센 욕설로 위협했지만, 총알처럼 빗발치는 서울말을 당해 낼 재간이 없었다. 나는 직설적이고 폭력적이었고 혼자였지만, 서울 아이들은 이성적이고 간접적이고 여럿이었다. 아이들은 이런 말을 노래에 얹어 부르며 나를 놀렸다.

“♩♪시골 놈 촌 놈 말라빠진 시골 놈 

 시골 놈 촌 놈 말라빠진 시골 놈 ♩"   


나도 지지 않고 이런 노래로 되갚아 주었다.

“♩♪서울내기 다마내기 맛 좋은 고래고기

 서울내기 다마내기 맛 좋은 고래고기 ♩"    

꿋꿋하게 싸웠다. 서울 아이들한테 항복하지 않았다. 마음에 상처 같은 것도 전혀 안 받았다. 머나먼 남쪽나라에서 치고받고 거칠게 놀던 몸이라 그 정도는 끄떡없었다. 게다가 학교 밖의 서울 살이가 정말 재미있었기 때문이었다. 서울에 와서 처음으로 텔레비젼을 시청 했고, 노란색으로 휘어진 바나나를 실물로 확인 했고, 육각형 가죽 무늬가 있는 축구공을 처음 차 보았다. 나는 서울특별시 장충동 2가 173번지에서 세파에 아랑곳하지 않고 씩씩하게 자랐고, 아홉 살 인생의 봄은 들장미와 함께 자박자박 다가오고 있었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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