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이상李箱론 - 순수의식의 뇌성과 그 파벽」, 이어령" 1편에서 이어지는 글입니다. 글에 대한 설명은 1편 서두에 서술되어 있습니다.
1. 이 상李 箱의 예술
A. Situation과 Parasélène
1
이상의 「생生에의 *표랑漂浪」은 끝없이 *황망荒茫한 의식의 *사구砂丘에서 부터 출발한다. 그의 의식은 노쇠한 인간의 역사와 위선과 인습으로 *도장塗裝된 현실의 일상적 생활에 대한 부정이며 회의다. <닫친 문앞에 탄생>한 그의 숙명적 자의식의 세계는 *과법過法의 역사를 그대로 이어 받는 상속자로서의 의무를 거부하며 보편적인 「일상성」의 욕구와 목적을 조소嘲笑한다. 「오감도」의 시 제2호號에서와 같이 <나의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 노릇을 한 꺼번에 하면서 살아야 하는> 현대인의 무거운 짐과 「시제3호」의 인생의 무의미한 *격투激鬪의 관객자와 피관객자의 노릇을 동시에 하는 비참한 삐에로의 행동을 의식하는 이상은 초조한 마음으로 부단히 전개되어 가고있는 역사와 현실을 비판하였다.
*표랑: 떠돌아다님. 떠돌아 헤맴. 표류.
*황망荒茫: '황망慌忙하다'는 기본적으로 '마음이 급하거나 당황하여 허둥거리는 상태에 있다'의 의미를 지니는데, 필자는 이 단어의 한자를 같은 음의 다른 자인 '거칠 황荒'과 '아득할 망茫'으로 바꿈으로써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 것으로 보인다.
*사구: 모래 언덕.
*도장: 도료를 칠하거나 바름.
*과법: 과중한 형벌.
*격투激鬪: 매우 심하게 싸움.
그러나 그의 눈에 비친 역사란 (전통) <*묘혈墓穴에 계신 백골까지가 내게 무엇인 가를 *강청强請하고 있는> 완고한 의지의 소유자이며 <그 인감印鑑이 이미 *실효失效된지 오래인>현대에 있어서의 한노망老妄한 시대 착오자일 따름이다. 그리고 현실이란 <「남편만 없었던들」「남편이 용서만 한 다면」하면서 지켜진 안해의 정조>와 같이 절대적인 감정을 상실한 추악하고 *부박한 *창부娼婦의 모습에 지나지 않었다.
*묘혈: 시체를 묻기 위해 판 구덩이.
*강청: 무리하게 억지로 청함.
*인감: 당사자의 동일성 여부를 확인하기 위하여 관공서 또는 거래처 등에 미리 제출해 두는 특정한 인발.
*실효: 효력을 잃음.
*부박: 마음이 들뜨고 경박함.
*창부: 창녀.
서정과 절대애정의 낙원을 상실한 그에게 이미 「별」과 「달」은 <시상의 대상>도 천문학의 대상도 아닌것이다. 이러한 현대적 자의식의 세계앞에 나타난 현실의 세계란 그에게 있어 또하나의 <실화失花>와 <실낙원失樂園>이었다. 그 실낙원의 일상생활 가운데 <천사는 아무데도 없으며> <파라다이스는 빈터>인 것이다. 천사의 시체만이 사는 현실적 일상세계에는 <절대적 공허>뿐이며 그 속에서 단조한 허실적 목적을 위한 정신의 *굉대宏大한 동원이 *분망奔忙하게 버러지고 있는 것 뿐이다.
*굉대: 어마어마하게 큼.
*분망: 매우 바쁨.
이렇게 추악한 창부성을 드러낸 아내(현실)를 발견하고 이상은 곧 「간음한 계집은 버리라」는 철칙에 의하여 실망한 일상생활적인 무의미한 *제반諸般 의식儀式과 제행諸行에 대하여 *홀홀히 고별을 하지 않으면 아니 되었다.
*제반: 여러 가지. 어떤 것과 관련된 모든 것.
*홀홀하다: 별로 대수롭지 아니하다.
그러나 이 일상적인 것과의 이혼수속은 극히 복잡한 난難문제이었다.
일상생활적인 것을 버릴때 우선 이상은 자의식의 세계에서만 머물러야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상성의 인생에서 도주한다는 것은 길이 막힌 도로를 공포에 싸여 질주하는 *도로徒勞의 비극이며 혹은 그러한 공포의 상태로서만 무한히 질주하는(뚫린 골목) 또하나의 무의미한 짓에 불과한 것이다. 도주하여도 도주를 하지않어도 결과는 마찬가지의 것이다. (도주하지 아니하여도 좋소) (오감도 시 제1호)
*도로徒勞: 보람없이 애씀. 헛되이 수고함.
또한 이의식 과잉상태의 세계란 본능을 박탈당한 <짓지 않는 개>로써의 무서운 권태의 세계인 것이다. 오늘은 내일과같고 모래는 오늘과 같은 Per dem per의 연속은 <답답한 하늘 답답한 지평선 답답한 풍경, 답답한 풍속가운데서 이리디굴 저리디굴 굴고 싶을만치 답답해 하고 지내야만 되는> 참을수 없이 괴로운 감금상태를 의미한다. 이렇게 <생물의 이렇다는 의의를 훌쩍 잃어버린> <환관과 같은> 자기를 발견하게 되고 <산다는 것이 필요 이상의 야유에 지나지>않음을 느끼게 된다. <사물의 어떤 포인트로 이 믿음이라는 역학의 지점을 삼아야겠느냐는> 대상이 *전연全然 발견되지 않는 그의 세계에서는 <*육친肉親까지를 미워하기 시작하여 이세상에 의지할 곳을> 상실한 고아의 막막한 심정이 있을 뿐이며 내일이란것도 한낱 <*흉맹凶猛한 *형리刑吏>로 밖에 생각되지 않으니 아무런 미래에의 희망도 희망도 의미도 기대도 목적도 찾아 볼길이 없는 것이다. 이렇게 일상성의 <날개가 부러지고 퍼렇게 멍들은 흔적만이 남아 있는> 그에게 어떠한 의미와 행동을 부여하는 동력이 그런 세계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전연: 아주. 도무지. 전혀.
*육친: 어버이와 자식, 형제, 자매 등과 같은 혈족의 관계가 있는 사람.
*흉맹: 몹시 사나움.
*형리: 지방 관아의 형방에 속한 구실아치.
그렇다고 그는 무의미와 맹목의 「일상적현실」 속에 머물러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는 덧없이 <불속으로 뛰어드는 불나비>와 같이 무모한 정열도 뛰어들 불도 발견할 수 없을 뿐 아니라 <모르는 척하고 그저 모이만 주어 먹는> <철망 넘어의 암탉을 보고> 공연히 성이 나서 근기 있게 자꾸 덤벼드는 <수탉>과 같이 무의미한 도로徒勞를 꾸준히 되푸리 할수도 없는 것이다.
다시 한번 싱거운 <인생의 제행>을 긍정하고 현실에 되돌아간다는 것은 <새로운 감정으로 간음한 아내>를 용서한 남편의 일생과 같이 <이놈의 계집이 또 간음하지나 않을까하고 전전긍긍하다가 그만두는 가엾이 허무한 탕진>이라는 것을 그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하는 수 없이 <될수있으면 그것이 간음은 아니라는 결론이 나도록 자신의 준엄앞에 애걸>하듯이 현실에 관대하려하고 또 선의로써 어떠한 의미를 *부회附會하려고도 해보고 혹은 이실낙원의 현실세계에 <천사를 다시 불러서 돌아오게 하는 응원기>같은 것을 생각도 해보는 것이다.
*부회: 이치에 닿지 않는 일을 억지로 끌어대어 이치에 맞게 하는 것. 말이나 이론을 억지로 끌어다 붙임.
그러나 이렇게 <무슨 방법으로든지 생활력을 회복하려 꿈꾸는 때도 없지는 않지만> 숙명과 같이 뿌리 박은 그의 자의식은 도저히 그러한 맹목의 「일상적 현실」 세계에의 순응을 불허하였든 것이다.
그렇다고 <현실은 나를 *逮挿하라고 하고 꿈은 나를 *축방逐放하라>는 발디딜틈없이 절박한 이 세계에서 그는 자수조차 할 수 없는 것이다.
*逮挿: '잡을(체포할) 체', '꽂을 삽'. 해독 불가.
*축방: 자리에서 쫓아냄
<경찰 화물자동차에나 질컥 치어 죽어버리지 그랬으면 이렇게 후덥지근한 생활을 면免허기라두 허지>하다가도 <짜장 화물자동차가 탁 앞으로 닥칠적이면 덴 겁을 해서 피하는 재주가 세상의 어떤 사람 보다도 능히 빠르다고는 못해도 비슷한> 역시 어쩔 수 없는 동물의 본성이 있었고 또는 <자살의 단서조차를 찾을 길이 없는 극極권태의 생활>에서 죽는다는 것 까지가 귀찮어진 상태에 놓여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것도 저것도 아닌 이러한 불안한 세계에서 어떻게 살아야할 것인가? <나는 어떻게 해야 하나 *거암巨岩과 같은 불안이 공기와 같이 호흡의 중압이 되어 덤벼든다>
*거암: 큰 바위.
이것은 「상」일개인만이 웨치는 처절한 비명과 통곡이 아니라 전 현대의 지성인들이 부르짖는 두려움의 *규성叫聲인 것이다.
*규성: 부르짖는 소리.
2
<나는 나의 친구들의 머리 에서 '나의 번지수를 지워 버렸다. 아니 나의 복장까지도 말갛게 지워 버렸다. 은근히 먹는 나의 *조석朝夕이 게으르게 나의 육신에 만연하였다. 나의 영양의 지꺼기가 나의 피부에 지저분한 수염을 낳았다. 나는 나의 독서를 뽀죽하게 접어서 종이 비행기를 만든 다음 어린 아이와 같이 나의 *자기自棄를 태위서 죄다 날려 버렸다.
아무도 오지 말아 안 들일 터이다. 내 이름을 부르지 말라 칠면조처럼 심술을 내기 쉬웁다. 나는 이 속에서 전부를 살려버릴 작정이다. 이 속에서는 아픈것도 거북한것도 등에 닿지 않는 것도 아무 것도 없다. 그냥 쏟아지는 것 같은 기쁨이 즐거워할 뿐이다. 내 맨발이 값비싼 향수에 질컥 질컥 젖었다.> —방선傍線 필자—
*조석: 아침밥과 저녁밥을 아울러 이르는 말.
*자기自棄: 스스로 제 몸을 버리고 돌아보지 아니함.
*방선: 주로 세로로 쓴 글에서 글줄 옆에 그은 줄. 본 문단에서는 밑줄친 부분에 해당.
그러나 「상」은 드디어 이렇게 일상성의 인생으로부터 그러한 자기 자신으로 부터 외부의 것으로 부터 완전히 자기를 절연하고 만 것이다. 의식의 문을 밖으로 향해 굳게 쳐닫고 그속에 농성해 있는 채로 자기 생을 기획한 것이다. 자기가 일상성의 인생과 그생활로 부터 고별한 것과 같이 현실이 또한 자기를 내 버리기도 한 것이었다. 그는 「일상성」을 호위하는 의장병의 대열속에서 통겨져 나오고 말었다. 그화려한 제복을 벗어던지고 그 공동체의 테두리밖에서 존재한다.
<묘지명이라. 일세의 귀재 이상은......여기 *백일白日아래서 그 파란만장(?)의 생애를 끝 막고 문뜩 졸卒하다......오호라! 상심傷心커다. 허탈이야 잔존하는 또하나의 이상李箱 *구천九天을 우러러 *호곡號哭하고 이한산寒山 일편석一片石을 세우노라. 애인 정희는 그대의 *몰후歿後 수삼인數三人의 *비첩秘妾된바 있고 오히려 장수하니 지하의 이상李箱아! 바라건댄 *명목瞑目하라>여기에서 보는거와 같이 일상적 현실속에 사는 이상은 이렇게 「*종생終生」하였고 그 일상성으로부터 허탈하여 잔존하는 또하나의 이상 만이 남게 된 것이다. 이렇게 일상성의 이상이를 완전히 죽이고 모든것에서 허탈한 또하나의 이상이 앞에 나타난 것이 소위 Paraphronique(*천치天癡 바보의 상태)즉 완전한 무관심과 게으름의 세계였다. 곧 「일상성」의 생활에 대한 「권태」는 「게으름」으로 그에 대한 조소와 야유와 Malice(장난)는 무관심으로 비약 발전한 상태다.
*백일: 구름이 끼지 아니한 밝은 해. 대낮.
*구천: 하늘의 가장 높은 곳. 하늘 위.
*호곡: 목 놓아 슬피 움.
*몰후: 죽은 뒤.
*비첩: 종으로 첩이 된 계집.
*명목: 눈을 감음. 편안한 죽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종생: 일생.
*천치: 선천적으로 정신 작용이 완전하지 못하여 어리석고 못난 사람.
이미 이 절정에 달한 의식세계는 「일상성」의 가치규준과 행위의 촉수가 이를수 없는 순수지대다.
이러한 세계에는 그냥 쏟아지는 것 같은 기쁨과 값비싼 향수가 질컥거리는 것 같은「의식의 평화」가 군림해 온다. 금전도 시간도 애욕愛慾도 일상적인 감정도 관능까지도 문제시되지 않는다. 희망도 절망도 아닌 행복도 불행도 아닌 그러한 <절대의 상태>가 있을 뿐이며 그의 성격마자 <설합같은 그릇에 담어><간데 온데 없어지고><*탄도彈道를 잃지 않는 질풍이 가르치는 대로 곧잘 가는 황금과 같은 절정의 세월>이 있을 뿐이다.
*탄도: 탄환이 발사되어 포물선을 그리면서 목적물에 이르기까지의 길.
이같은 Paraphronique의 무관심의 세계에는 일상성의 모든 *기반覊絆과 *질곡桎梏에서 벗어난 *광양汪洋한 자유같은 것까지가 있는 것이다.
*기반覊絆: 굴레에 얽매여 살아감.
*질곡: '차꼬(죄수를 가두어 둘 때 쓰던 형구)와 수갑'이라는 뜻으로, 즉 속박이라는 뜻.
*광양: 미루어 헤아릴 수 없게 광대廣大함.
<나는 바른대로 말하면 애정같은 것은 희망하지도 않는다. 그러니까 내가 결혼한 이튿날 신부를 데리고 외출했다가 다행히 길에서 그 신부를 잃어 버렸다고 하자. 내가 그럼 밤잠을 못자고 찾을까?그때 가령 이런 엄청난 글발이 드러왔다고 나는 은근히 희망한다. 「*소생小生이 모某월모某일 길에서 주슨바 소녀는 귀하의 신부임이 확실한듯 하기에 통지하오니 찾아 가시요 」
그래도 나는 고집을 부리고 안간다. 발이 있으면 오겠지, 나의 염두는 그저 광양한 자유가 있을 뿐이다> —동해童解—— (방선필자)
*소생: 예전에, 말하는 이가 자기를 낮추어 이르던 1인칭 대명사.
그는 또한 이와같은 「의식의 평화와 자유」를 위해서 무관심과 게으름을 지속시키고 외부의 일체 자극을 의식적으로 계속하여 두절하려고 한다.
<—그저 한 없이 게을른 것—사람노롯을 하는 채 대체 어디 얼마나 기껏 게을를 수 있나 좀 해 보자―게을르자―게을르자―그저 한없이 게을르자―시끄러워도 그저 모른체하고 게을르기만 하면 다 된다 살고 게을르고 죽고―가로대 사는 것이라면 떡 먹기다. 오후 네시 다른 시간은 다 어디갔나. 하루가 한 시간도 없는 것이라기로 서니 무슨 성화가 생기나> <반닫이는 참 보기 싫다. 대체 세간이 싫다. 세간은 어떻게 하라는 것인가. 왜 오늘은 있나 오늘이 있어서 반닫이를 보아야 되느냐. 어둬졌다. 계속하여 게을른다. 오늘과 반닫이가 없어지라고>—*지주회시鼅鼄會豕—(방선—필자)
*‘지주회시(지주會豕)’는 ‘거미가 돼지를 만나기, 또는 모으기’라는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돼지를 의미하는 시(豕)는 ‘발얽은 돼지의 걸음걸이’를 의미하는 축(豖)자의 파괴로서, ‘거미줄에 얽힌 돼지의 걸음걸이’라는 이미지를 전달한다. 따라서 ‘지주회시’라는 제목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서로 이용하고 파괴하는 가해적인 인간관계를 상징한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지주회시(鼅鼄會豕))]
이와 같이 게으름은 그렇게 땀흘리며 억지로 사는 생활을 떡먹기 같이 쉬울게 만든다. 그래서 세간 (생활도구 즉 일상생활적인 것)이 오늘이 미워서 그는 게으름으로 그들에 대하여 무관심하려고 한다.
그야말로 <그저 까닭없이 펀둥 펀둥 게을르고만 있으면 만사는 그만이었던 것이다.>—날개—
*여사如斯한 無關心과 게으름의 Paraphronique 세계는 그의 <불행의 실천>과 최대한도의 현실의 체험끝에 이른 자의식의 종착점이다. <감정의 포-스가 부동자세에까지 고도화하여 감정의 공급을 딱 정지한 상태>이다. 즉 자의식의 의식마자 의식하지 않게된 그러한 경지라고 말할 수 있다.
*여사如斯: 이러함.
3
그러나 이상以上과 같이 Paraphronique의 상태는 그에게 있어 하나의 “*Pied-à-terre”에 지나지 않는다. 너무나 순간적이며 단정적인 것이었다. 이러한 Paraphronique 한 순絶의식세계와 일상적인 현실의 세계는 <흡사 두개의 태양처럼> 상극 대립하여 존재하는 것이다. 왜냐 하면 Paraphronique한 의식세계가 「일상성」을 *양기揚棄하여 이루어 진 것이 아니고 일방적으로만 고도로 발전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무관심과 게으름의 Paraphronique한 세계는 항상 「일상성」의 현실앞에 상대하여 임하게 되는 또하나의 숙명을 지닌 「생生」이었다. 즉 <방심상태>—Paraphronique—를 꾸미고 방안에 서는 천정만 쳐다 보거나 나오면 허공만 쳐다 보거나 하재도 역시>주위에 <싸고도는 온갖것—*Täglichkeit 일상성—에 대한 증오의 념念이 무럭무럭 구름일듯하는 것은 영 막을 길이 없는>불가항력의 일이며(내부적) <아무리 방덛문을 첩첩 닫고 일년 열두달을 수염도 안 깎고 누어있다 하더래도 —Paraphronique—세상은—Täglichkeit—그 잔인한 관계를 가지고 담벼락을 뚫고 스며>들고야 마는(외부적인 것) 절대의 관계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이상은 다시 자기 내부에서 분열된 이 두세계의 자기 분신을 결합하지 않은 이상以上 역시 불안한 기압권에서 헤어 나올 수 없는 것이다. 그는 이 두 세계의 생을 다시 연결하는 투쟁을 계속한 것이다.
*Pied-à-terre: 불어로 '임시거처'.
*양기: 지양.
*Täglichkeit: 독어로 '매일 일어나는 일', '일상사日常事'.
이두가지 세계를 관계지우는 것이 그의 예술에 있어 본질이 되는 것이며 그의 전작품이 향하는 하나의 결론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그자신의 마지막 *희구希求한 새로운 「인생」이기도 한것이다.
*희구: 바라고 요구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