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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튼과 소스: 미키17 리뷰 (스포주의)

불명확한 인과관계로 점철된 세상. 과대불안도, 과소불안도 자기파멸적이다.

by 제이원

봉준호 감독의 첫 번째 외국 영화, 미키17에는 두 가지 상징이 나온다.


버튼과 소스.


버튼을 누른다는 것은 무엇인가? 사건의 인과관계에 개입하는 것이다.


미키가 버튼을 누르자 자동차가 폭발했다면, 그것은 미키가 버튼을 눌렀기 때문에 발생한 사고로 해석된다.


버튼을 누르지 않았어도 발생했을 폭발일 수 있는건데

그러한 면책의 여지는 버튼을 누르는 순간 사라진다. 따라서 미키는 버튼을 누르는 것이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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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아무것도 하지 않은 미키는 삶의 수렁으로 빠져든다. 마카롱이 햄버거를 제낄 것이라는 바보 같은 소리에 의문을 제시하지 못하고, 익스펜더블로 부당하게 차출되는 상황에서도 의사표현하지 못한다.


미키가 마주한 '버튼 트라우마'의 대가는 익스펜더블이 된 이후 더 심해진다. 미키는 자신의 생존 여부까지 타인에게 의탁하는 신세로 전락한다.


이제 미키에겐 인생의 탈출구가 없다. 익스펜더블은 자살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물론 미키는 자살이라는 버튼조차 누를 깜냥이 안 되지만.


정리하자면, 버튼에 대한 미키의 공포심은 자기파멸적 과대불안이다.


반대로, 소스는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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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파 마샬은 유독 소스에 집착한다. 자신의 남편 케네스 마샬에게 먹일 소스를 개발하기 위해 사력을 다한다.


소스는 인과관계를 불명확하게 만든다. 모든 걸 쓰까버리기 때문에.


일파의 소스를 먹고 배탈이 난 미키는, 무슨 재료가 그의 속을 뒤집었는지 알 수 없다.


소스를 만든 일파조차도 어떤 재료가 미키를 배탈으로 이끌었을지 확정지을 수 없다.

문제의 재료가 다른 정상적인 재료들과 섞이게 되면, 문제의 재료는 책임소재를 피할 수 있다.


일파가 자신보다 우둔한 케네스를 내세우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독단적으로 정계에 나서는 것은 위험하다고 느끼는 것이다.

하지만 일파와 케네스가 하나의 소스처럼 섞인다면, 그녀에게는 면책의 여지가 생긴다.


그리고, 소스는 일종의 미신이다.

소스는 소스 제작자를 제외하면, 이 안에 무엇이 들어갔는지 아무도 알 수 없다.


소스 제작자는 '좋은 재료가 들어갔다'고 말하고, 섭취자는 '제작자가 좋은 재료를 넣었겠거니'하고 먹는다.


소스가 '사회적 신뢰'를 상징하는 은유인 것이다.


사회적 신뢰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지만, 오늘날엔 이를 악용하는 사람이 너무 많다는 것이 문제다. 마치 케네스 부부가 미키를 속여 소스 테스트를 하듯 말이다.

미키같은 피실험자들을 거쳐 만들어진, '정말로 좋은 소스'는 결국 케네스의 입으로 들어간다.


소스의 신뢰도를 검증할 수 있는 이는 섭취자 자신 뿐인데, 대부분의 섭취자들은 이러한 검증 과정을 건너뛰곤 한다.


왜? 재미없으니까!


지나친 낙관주의를 가지는 것이다. 다른 말로는 자기파멸적 과소불안이다.

케네스 부부가 소스를 사려깊게 만들었겠지. 니플하임 행성에 가면 삶이 나아지겠지. 우주선에선 섹스를 못 해도 행성에 가면 씨를 잔뜩 뿌릴 수 있겠지.


정치인에게 너무 편한 세상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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