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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잎풀 Oct 14. 2017

그들도 아픔을 느끼는 건 같다

여유를 행사하기




초등학교 시절부터 알고 지내던 친구들 몇 명과 낚시를 가 보기로 했다. 취미가 있던 것은 아니었지만, 들과 공유할 수 있는 에피소드를 하나 만들러 간다는, 여행을 떠나는 기분으로 그 길을 나섰다. 여차하면 친구들이 낚시를 할 때 내가 라면이라도 끓여야지라며 말이다.



아무래도 낚시터는 도심을 벗어나 바다로 나가야 하니까, 이동하며 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의 변화를 감지하게 된다. 그렇게 자연이 그려놓은 그림을 마주하고는 한참을 넋을 잃고 바라보게 된.


슬슬 바다 냄새도 나기 시작하는 것 같고, 우리는 이내 섬으로 들어가는 긴 다리를 건넜다. 나이가 들어서 이렇게 좀 한적하면서 자연과 가까운 곳에서 사는 것도 괜찮겠다는 친구도 있고, 불편하다며 그래도 도심이 좋다는 이도 있었다.


도중에 들른 휴게소에서 낚시에 필요한 미끼나 간식거리를 챙기고는, 점찍어뒀던 장소에 금방 도착을 했다. 이라 그런지 구름 낀 하늘 사이로 주홍빛 물감이 칠해져 있다. 속에 쌓였던 답답함을 뻥~ 뚫어주는 수평선과 하늘을 보는 것도 잠시, 준비한 낚시채비를 양손에 들고는 적당한 포인트에 자리를 잡았다.



오늘 집을 나서기 전, 친구들은 두껍게 챙겨 입고 나오라고 했었는데 과연, 바닷바람은 생각보다 세찼다. 패딩 조끼를 하나 더 챙겨서 다행이었다. 처음에는 호기로 그냥 자리를 버티며 지켰지만, 이건 아닌 같다며 차에서 조끼를 꺼내오는 데까지의 시간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낚시를 종종 다녔던 친구들은 내게 교대로 와서 이것저것 알려주었다. 친구의 낚싯대를 하나 빌려서는, 이제 내가 해 볼 차례였다. 맨손으로 하기는 익숙지 않아, 목장갑을 끼고 미끼로 쓸 갯지렁이를 집으러 작은 상자를 열었다. 기다란 것들이 꿈틀거린다.


¿ ~


낚싯바늘 끝에 지렁이를 꾀기 위해서 들고서, 바늘 끝이 지렁이의 배를 향해야는지, 등을 향해야는지, 피부 바깥에서 안쪽으로 뚫고 들어가야 하는지, 주둥이를 통과해서 바늘을 넣고는 안쪽에서 바깥으로 뚫고 나와야 하는지...  어떻게 해야 할는지를 결정해야만 했다.


일단 아무렇게나 해보자며 바늘을 찌르는데, 지렁이가 내 손놀림에 맞춰 움찔거린다. 내가 그리 과감하지 못했는지, 단번엔 성공 못했다. 그래서 다시 찌르는데 지렁이가 또 움찔거린다. 그리고는 주둥이를 크게 벌렸다가 오므렸다를 반복한다. 소리를 들을 수는 없었지만, 뭔가 고통스럽다는 것 같고 외침이 들리는 것만 같았다.


이전까지는 그냥 미끼 정도라고 생각했던 녀석들이었는데, 내 바늘의 찌름에 맞춘 격렬한 몸부림에 살아 있는 생명이라는 걸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내 손으로 무언갈 죽이는 게 익숙지 않았지만, 낚시를 해야 된다는 생각에 이때의 망설임은 못 본 채 되었다.




낚시하는 사람들을 보고 있으면 대를 잡고 가만히 있는 것 같다. 그런데 직접 해보니까 던진 대로 기다리기만 하는 게 아니라, 약간 들어 올렸다 내렸다가, 좌우로 조심스레 포인트를 옮겨도 보고 그랬다. 그렇게 물고기가 낚싯바늘을 물고 당기는 입질이 있는 것 같은 지점을 찾아갔다. 그러니까 멍한 기다림으로 보였던 낚시는, 손끝에 집중해 여기저기를 탐색하는 과정이 있었던 거였다. 낚시는 문외한이라 원래 다들 이러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느낀 바는 이랬다.


농어보다 훨씬 작던 볼락


초심자의 행운이라는 말이 있던가? 이날 첫 개시는 내가 했다. 생각보단 빠르게 친구들보다 먼저 농어 한 마리를 올렸다. 이후로는 볼락을 많이 낚았다. 그렇게 잡아 올린 녀석들의 입에서 바늘을 뽑아야 하는데 쉽게 되질 않았다. 옆에 놓여있던 연장을 들고는 다시 시도를 다.


아까의 장면이 또 연출됐다. 내 손 끝의 움직임에 따라 볼락의 아래턱은 열렸다 닫혔다를 반복했다. 원래는 땅바닥에서 파닥거리며 그렇게 저항을 했었는데, 이 순간만은 너무 아픈지 입만 뻐끔뻐금댔다. 마치 온몸에 찌릿한 전기가 흐르는 느낌으로 어버버.. 하는 것처럼 보였다. 곧 볼락의 입에서 바늘을 빼내는 데는 성공했고, 잡은 물고기들을 넣을 통에다가 담았다.


다시 말하지만, 나는 무언갈 죽이는 것이 익숙지 않다. 안 그럴 때 역시 있지만, 방 안에 들어온 모기도 잡는 것보다는 가급적 창 밖으로 내쫓곤 한다. 그런 내가 볼락이 눈 앞에서 너무 아파하는 것 같으니, 굳이 직접 잡고 싶다는 생각은 쑥 들어가 버렸다. 그 모습이 너무 처량하거나 안타깝게 느껴졌다. 그런데 평소에 생선구이나 삼겹살, 치킨 같은 것들은 잘 먹고 심지어 좋아하던 나 아니었던가? 두 모습이 오버 렙 되면서 나를 혼란시켰다. 나는 잠시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겠는 딜레마를 느꼈다.



초심자의 행운은 그리 길게 이어지지 않았고, 친구들보다 먼저 낚시채비를 정리했다. 그러고 나서는 낚시터 근처를 배회하며 스마트폰으로 여기저기 찍고 다녔다. 자정이 다가올 무렵이 되어서야 친구들도 짐을 싸기 시작했고, 오늘의 수확으로 친구들은 큼지막한 갑오징어 몇 마리를, 나는 작은 볼락 몇 마리와 농어 정도였다.






인간으로서의 한계


모든 생명은 살아있음을 유지하기 위해 무언가를 섭취해야 한다. 생명활동에 필요한 에너지는 체내에서 자연스레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외부에서 공급을 받아야 한다. 체내에서 합성된 에너지로만 생존이 가능하다는 것은, 무한동력과 같은 불가능의 영역에 존재한다.


먹는다는 것은, 내가 살아남기 위해서 무언가를 죽여야만 가능하다. 그게 내 손에서 직접 일어나지 않아 실감이 나지 않았을 뿐, 혹은 문명사회 속에서 가려져 잘 보이지 않아 둔감해졌던 거지, 우리는 무언가를 죽여야만 생존할 수 있었던 거였다. 이건 인간이자 한 생물로서 피할 수 없는 한계다.



나는 고기를 좋아하고 건강히 살아남고 싶다. 반면에 나처럼 고기를 섭취하려는 이들을 위해 죽어나가는 생명이 눈 앞에서 아파하는 걸 보는 건 싫다. 내 손으로는 더 그러고 싶지 않다. 그런데 이런 마음이 한편으로는 너무 이기적이었던 것 같다. 나는 깨끗하게 손질된 재료들만 대접받고 싶었던 거였다. 내가 나쁜 사람이 되는 것 같은 기분은 피하면서 내 이득만 취하려고 말이다. 이를 인지했다고 앞으로도 그러지 않을 거라고는 장담을 못하겠다. 나는 여전히 지금과 같을 것 같다.


만약 당신이 특별한 날마다 바닷가재 요리를 먹는다면, 그리고 그러한 습관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는 행위가 당신의 마음을 불편하게 한다면, 당신은 동물을 이용하는 우리의 방식에 대해 의구심을 갖지 않으려고 노력할 것이다. 당신이 식습관을 바꿀 생각과 의지가 없다면, 공장형 농장이나 도축장과 관련된 끔찍한 사실을 접해도 일단은 자기방어적인 태도를 보일 것이다.

이처럼 무언가를 포기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염려 때문에, 혹은 극단으로 갈 수도 있다는 우려 때문에, 우리는 인간과 동물의 관계를 재고하는 데 종종 위압감을 느낀다.

Jean Kazez, <동물에 대한 예의> 中




욕심쟁이


언론 보도를 통해 나오는 통계를 보면, 국내 반려동물 산업이 성장세인 것 같다. 이를 잘 반영하듯, 얼마 전에 유명 포털 사이트들 메인화면에도 반려동물 탭이 등장했다. 이 성장의 배경에는 1인 가구의 등장과 초고령화 사회로의 진입이라는 요인이 가장 크게 차지하고 있지 않았을까 싶다. 그러고 보면 확실히 십수 년 전보다는 요즘이 길거리 어디서든 산책하는 개들을 보기 쉬워진 것 같긴 하다.


반려동물 산업의 호기는 유기견의 증가 역시 불러왔다. 함께 집에서 지내다 어느 순간에 나몰라라 하고 길거리에 버려버리는 사람이 많아진 거다. 그 사정 하나하나 열거하기야 어렵지만, 결론적으로 어쨌든 끝까지 함께한다는 책임감은 그렇게나 지켜지는 건 아닌 것 같다. 감탄고토라는 사자성어가 떠오른다.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분명 있긴 하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인간이 다른 종보다 중요하다고 믿는다. 그리고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 다른 종을 우리의 욕구에 맞게 이용하고 착취한다. 자연이 집터였던 그들을 포획해 동물원 우리 속에 가두고, 쇼를 위해서 조련을 한다. 특별한 외모로 만들기 위, 어떤 특징을 가진 개체끼리 교배를 거듭해서 새로운 견종을 만들어 냈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이렇게 만들어진 견종은 대게 특유의 유전병을 하나씩 지니고 있다. 또, 잘 곳과 먹이를 제공받아 키워지고, 성체가 되면 도축이 되어 우리에게 고기로 공급되기도 한다.




에서 오는 고귀함


내 이익만 생각하는 건 쉽고도 편한 길이다. 그리고 그게 내게 만족스러운 행복을 가져다줄 것도 같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우리는 그런 삶만으로는 완전한 행복을 만지기 어렵다. 마음 한구석이 뭔가 채워지지 않는달까. 어떤 허전함을 느끼는 순간이 있기 때문이다.  채우는 방법으로 사람들은 자신의 소중한 것을 내어주곤 한다.


우리는 자기보다 약한 대상이나, 혹은 자기보다 강할지라도 그 대상이 더 강한 대상을 만나 발버둥 치는 모습을 볼 때에 어떤 애처로운 감정을 느낀다. 측은지심이라고 하면 될까. 그렇게 이들을 보고는, 나의 것들을 희생해 도와주기도 한다. 이에는 부모가 자식에게, 연인이 연인에게, 어떤 사고를 당한 이들에게, 한 사회에서 불가항적으로 밀려난 이들을 위해 등 많은 예시가 있다. 우리는 그럼으로써 완전하지 못했던 마음속의 행복을 완성시킨다.



내 것만 취하지 않고, 내 것을 다른 이에게 줄 수 있는 이런 기지는 사람이 고귀할 수 있다는 증거가 아닐까 싶다. 물론 야생동물의 세계에서도 관찰되는 현상이긴 하지만, 확실히 사람들에게서의 그 빈도나 나타나는 방식이 더 다채롭고 많을 거다. 나만 생각하며 살기도 바쁜데 다른 이에 대해 배려하고 사려 깊은 행위를 할 수 있다는 건, 얼마나 여유 있고도 낭만적인가.


우리는 동물들이 이익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들의 이익을 고려해야 하며, 그들을 도덕적 배려의 대상으로부터 배제하는 것은 정당하지 못한 것이다. 인간에게 유익한 결과를 가져오는지의 여부에 따라 동물을 배려할지의 여부가 결정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동물의 이익 자체가 배려를 보증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Peter Singer, <동물 해방> 中





식탁 위의 감사함에 대해 한 번 더


유흥의 측면에서 저들을 죽이는 거나 이용하는 게, 조금 지양되는 방향이 더 좋지 않을까. 사람에게는 무언가를 죽이거나 사냥함에서 오는 쾌감이나 욕구 같은 것도 있다. 하지만 그것만을 따라가며 산다는 건 우리와 야생동물의 차이를 만들지 한다. 자연계 먹이사슬의 최상위권 포식자가 된 우리는 분명 우리를 더 우리답게 만드는 다른 뭔가가 있을 거다.


오늘 저녁 식탁 위에 오른 음식들을 보고서, 조리해 준 사람이나 이 식재료들이 여기 오기까지 들어간 모든 사람들의 노고에 대한 감사함만을 가지는 데 그치지 않고, 나나 가족을 위해 죽어나간 생명이 있었다는 사실도 한번씩은 상기시켜보면 어떨까. 우리가 먹고 있는 것은 아픔을 느끼는 살아있던 것들이었다.


여기에 더해, 내가 살아남기 위해 저들을 죽여야 한다면, 그 고통을 짧고 작게 느낄 수 있는 방법은 계속해서 모두가 고민했으면 좋겠다. 산업과 효율이란 측면에서, 이게 쉽지 않은 길일 수 있다. 기본적으로 모두 돈이니까 말이다. 예를 들면, 얼마 전에 한창 이슈였던 살충제 달걀과 공장식 축산에 대한 문제가 있었다. 사람들은 당장에 친환경적이고 동물복지 농장이 늘기를 원하지만, 그렇게 되면 공급량이 줄거나 값이 엄청나게 뛸 거다. 이외에도 소나 돼지의 도축까지의 과정을 한번 확인해보면 아직 뭔가 부족하다는 점을 느낄 수도 있다. 개는 말할 것도 없다. 쉽지 않은 문제들이지만, 그래도 이 필요성에 공감하는 이가 많아진다면 좀 더 나은 우리가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지구 위에는 우리만 살고 있는 게 아니니까.


Greatness of a nation and its moral progress can be judged by the way that its animals are treated - Mahatma Gandhi





인간이라는 데서 오만을 범하지 않고, 여유 있을 권리를 행사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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