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된 휴식
1.
"축제를 앞둔 농부는 몇 배로 열심히 일할 수 있을 것이다. 약속된 휴식이 있으니까. 그리고 우리에겐 죽음이라는 약속된 휴식이 있다. 따라서 몇 배로 맹렬하게 살아갈 수 있다."
"휴식이 약속되어...... 죽음이?"
"그렇지요. 그것이 우리 인간에게 주어진 선물이지요."
"그럼 죽음이 축제라는 말이에요?"
"축제가 일상에서 벗어난 것을 의미한다면, 그리고 일상의 피로를 모두 잊고 자신마저도 잊을 수 있는 의미에서의 축제라면 죽음은 곧 축제인 셈이지요."
"약속된 휴식이라......"
2.
"앞을 보면서도 뒤에 따라오지도 않는 추적자를, 혹은 자신의 과거, 어제의 실수 따위를 생각하면서 진구렁에 발을 빠뜨리는 사람이 있다면 넌 그 사람을 뭐라고 부를 거지?"
"바보...... 지?"
"그래. 바보는 마치 곰곰이 생각하기만 하면 지나간 실수가 바로잡아질 것처럼 믿지. 과거는 절대로 바꿀 수 없는 것, 완전히 고정된 것인데 말이야."
"그럼 범부는?"
"범부도 어떤 의미에선 바보와 마찬가지야. 다른 점이 있다면 지나간 실수를 생각해서 앞으로는 실수를 하지 않는 것이 범부, 보통 사람일 뿐이지. 하지만 범부라고 해봐야 결국은 그 사람도 과거가 있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야. 바보든 범부든 과거라는 시간의 산물이지. 바보는 그것에 매달리고, 보통 사람들은 그것에서 배운다는 점이 다를 뿐이지."
"그럼 현자는?"
"현자는 과거의 시간과 상관없는 존재가 현자야. 그는 현명하므로 과거를 굳이 생각하지 않아도 미래를 깨달을 수 있지. 만일 네가 내 앞모습이 아니라 그 뒤에 있는 것을 생각해서 볼 수 있다면 넌 현자인 셈이지."
3.
"미래가 완전한 선물이 되도록 하기 위해 우리는 또 다른 커다란 선물을 받았다. 죽을 수 있는 것, 그리고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것. 불멸의 운명을 가진 신은 우리를 부러워할지도 모르지."
4.
"인간에게 있어 충실한 생에 대한 보답은 약속된 휴식이오. 그것은 인간에게 주어진 선물. 당신들은 죽을 수 있고, 죽을 때를 모르오."
"우리는 단수가 아니다. 그 복수성에서 비롯되는 불사성은 죽음과 망각을 통해 유지되는 것이겠지. 시간의 종인 나는 잘 알고 있소."
이영도 작가님의 <드래곤 라자> 중에서
이영도 작가님의 <드래곤 라자>는 중학교 시절부터 내 인생 책이었다. 대학교 자소서와 영문과 전공 진입 면접 때 언급한 책이니 말 다했지. 인간의 유한성을 다룬 책으로서 단순 판타지 소설이 아니다. 여러 종족과의 차이를 통해 인간에게 주어진 '죽음'과 '망각'이 '선물'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작가님의 후속 작품 모두 압권이다.
이번 설날 때 집 책장에 꽂혀있는 이 책을 다시 읽어어지!라고 생각하고 집에 왔는데 동생이 먼저 집어서 읽고 있다. 까탈스러운 내 동생의 마음도 사로잡았으니 그걸로 이야기 끝!
내가 오지 여행을 다니다 보니 어떻게 그런 장소들에 갈 '용기'가 나느냐고 묻는 사람들이 있다. 정확히 말하면 '용기'는 아니다. 왜냐하면 집으로 돌아오지 못할 가능성이 항상 존재한다고 생각하고 떠나기 때문에. 그래도 떠나는 이유는 사고가 나더라도 내가 원하는 일을 하다가 생기는 일에는 후회가 없을테니까.
어쩌면 그래서 난 마음 가는 대로, 내 호기심이 이끄는 대로 움직일 수 있는지도 모른다. 내 호기심이 나를 이제 어디로 이끌지 매우 궁금해지는 밤이다.
- 20.01.26 설 연휴 끝자락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