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시간 일출 트레킹, 그리고 불타오르는 피츠로이

[남미 파타고니아 여행 #7]

by 세계뚜벅이 이피
@피츠로이, 엘 찰텐, 아르헨티나
190503


알람 없이 저절로 눈 뜨고 보니 새벽 3시 40분이다. 공용구역(common area)으로 나와서 와이파이를 쓰고 있는데, 방문 하나가 열린다. 그리고 이윽고 등산복장을 한 남자 한 명이 나온다. '일출 트레킹 가시는 건가?' 싶어서 말을 걸었다.


"혹시 피츠로이 일출 트레킹 가는 건가요?"
"."
"시 헤드 토치 있으신가요?"
"ㅇ"
"와. 혹시 정상까지 같이 갈 수 있을까요? 헤드 토치를 못 구했는데 핸드폰 배터리가 방전될까 봐 길을 나서지 못하고 있었거든요."

"당연히~ 여자 친구도 같이 가니까 우리 따라와요."

후다닥 옷을 챙겨 입고 미국 커플 산행에 따라나섰다. 얏호!!! 일행 중 한 명이 전등이 있으니 핸드폰 배터리 방전도 감수할 수 있다. 편하게 손전등 기능을 켜서 등산했다.


깜깜한 밤 4시에 출발. 은하수 가득한 하늘을 보며 트레킹 시작. 우유니급 은하수가 펼쳐진 하늘을 보며 감탄했다. 심지어 우유니와 달리 마을 빛이 안 보여서 더 별이 잘 보이는 느낌?! 일출 트렉킹이 아니라 별빛 트레킹(starlight trekking)이라고 해야 할 듯?

사진이 찍힐 정도로 밝아졌다. 마음이 급해진다.

6시 반~7시 즈음되니 점점 하늘이 밝아진다. 그동안 안보이던 달도 보인다. 마음이 급해졌지만 마의 구간이라고 불리는 얼음 빙판 바위길을 올라가던 중이라 천천히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일출 준비 중인 산 능선

정말 정말 힘들게 피츠로이를 가장 잘 볼 수 있는 라구나 데 로스 트레스(Laguna de los Tres)에 8시 45분경 도착.

다행히 일출 5분 전에 도착. 아직은 어두운 회갈색의 피츠로이
해가 떠오르니 점점 붉게 타오른다
와....멋지다. 세계 5대 미봉(美峰)이라더니 장관이다
해가 떠오르고 나니 회갈색으로 변했다

붉은 피츠로이 봤어, 봤다고!!!! 이 10분을 위해 장장 5시간을 어둠에서 걸은 거구나. 빙판길 걸을 때는 '정말 내가 여기서 왜 이러고 있지'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보람이 있다!


나와 미국 커플 일행이 호수에 도착하기 전에 먼저 도착한 중국인 3분이 계셨다. 삼각대로 사진을 찍으시는 중이더라. 이야기를 나눠보니 불타오르는 피츠로이를 담기 위해 3일 동안 캠핑하며 3일 내내 아침마다 이 호수에 올라오셨다고 한다. 어제까지는 날씨가 별로였고, 오늘이 최고라고. 우리 보고 운이 정말 좋단다. 7시 반만 해도 피츠로이가 구름에 가려있었는데 점차 걷혀서 은하수도 찍고 붉은 피츠로이도 찍었다며 "mission completed!"라고 정말 좋아하신다.

산 능선 위로 해가 떠오른다

이 좋은 광경을 우리 여섯밖에 못 봤다. 나중에 들어보니 일기예보에 오늘은 구름 낀다고 했고, 레인저들 날씨 차트도 구름 낌이라더라. 심지어 며칠 전 눈이 왔으니 길이 미끄럽다고 생각해서 사람들이 안 올라온 것. 나는 몰랐으니 무모할 수 있었다. 혼자였음 절대 못했다.

마의 구간 바위길이 꽝꽝 얼었다

하산길은 또다시 빙판과의 사투. 등산 스틱이 없었다면 큰일 날 뻔했다. 내려가는 길에 모레노 빙하 빅 아이스 투어에서 만났던 한국분을 마주쳤는데 스틱 없이 올라오시길래 스틱 하나를 빌려드렸다. 혹시나 미끄러지실까 봐. 호스텔에 잘 반납하셨겠지?

저멀리 보이는 피츠로이는 일출 때와는 다른 자태를 뽑낸다
피에드라스 블랑카스 빙하(Glacier Piedras Blancas)

토레스 델 파이네 공원에서 그레이 빙하를 못 본 것이 아쉬워 하산할 때는 피에드라스 블랑카스 빙하(Glacier Piedras Blancas) 쪽으로 길을 틀어서 빙하를 보고 마을로 내려가려고 각했었다. 하지만 오늘 빙하 길에서 체력을 너무 많이 써서인지 피곤해서 패스! 멀리서 감상하는 것으로 만족했다. 빙하는 언제나 멋지단 말이지.


피츠로이를 볼 수 있는 호수 정상까지 올라가는 길은 두 가지다. 1) 카프리 호수(Lake Capri), 2) 전망대(Mirador). 우리 올라갈 때 1), 내려올 때는 2)를 택했다.

10.2km. 편도기준인 듯. 그럼 오늘 20.4km 산 탄건가..?

트레킹을 마치고 보니 핸드폰 배터리가 비행모드에서는 생각보다 훨씬 오래 버티더라. 10시간 트레킹 이후에도 배터리가 67% 남아있었다. 내가 이 사실을 미리 알았더라도 혼자 트레킹을 완주하긴 어려웠을 거다. 소위 말하는 '마의 구간'인 마지막 바위길 구간이 얼음 빙판이 되어 무척 미끄러웠다. 혼자라면 무서워서 못 올라가고 포기했을 거다. 사고 나도 대신 연락해줄 사람도 없었을 거고. 원래 1시간 걸린다는 길을 우리 셋이서도 거의 1시간 50분 걸려서 올라갔고 겨우겨우 일출 시간을 맞출 수 있었다. 미국 커플 덕분에 너무나도 멋진 광경을 봤다. 정말 고마웠던 커플.


호스텔에서 조금 쉬다가 다시 엘 칼라파테로 돌아갈 준비를 했다. 그전에 수고한 나를 위한 스테이크 한 끼.

버스터미널 엘 미라도르(El Mirador). 전망대라는 뜻답게 식당에서 피츠로이가 보인다.

이제 솔직히 다른 아르헨티나 음식 좀 먹어보고 싶은데 식당에 별다른 메뉴가 없다. 그래도 이 스테이크가 아르헨티나에서 먹은 스테이크 중에 젤 맛났다. 버스 터미널 안의 엘 미라도르(El Mirador)라는 식당인데 버스 기다리며 밥 먹기 최적의 위치.


저녁 6시 버스를 타고 엘 칼라파테로 돌아간다. 아주 빡빡한 일정이다 ㅎㅎㅎㅎ 노을 진 피츠로이를 뒤로 하며, 안녕!

노을과 함께 피츠로이를 마음에 담는다


내 마음의 고향, 엘 칼라파테로 돌아와 아메리카 델 수르(America del Sur) 호스텔로 왔다. 이번 여행 8박 중 4박이 이 호스텔이다. 정말 최고의 호스텔이다. 일단 뷰는 차치하고 호스텔 자체가 따뜻하고, 바닥도 난방하는지 차갑지 않다. 게다가 조식도 맛나지!! 엄지 !

선글라스 뽀그짝!

지난번 묵은 방과 동일한 방으로 배정되어 짐을 푸는데 선글라스가 사망해있다. 내일 빙하 크루즈에서 빙하 볼 때 써야 되는데 ㅜㅜ 내가 너무 험하게 여행하니 선글라스가 못 버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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