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버려 두지않는 사람들
10년 차 뼈직장인에서 사업의 영역으로 넘어온 후, 내가 어려워했던 일들은 셀 수도 없이 많지만 그중의 제일은 ‘고고함을 버리는 일’이었다. 돈을 버는 방법에 고고하고, 돈을 생각하는 일에 수줍고, 돈과의 관계가 서먹하기만 한 사람이 돈을 ‘직접’ 버는 시장에 들어오려니 삐그덕거리는 부분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10년의 커리어를 쌓고 나서야 나는 내 안에 숨어있는 야망을 발견했지만, 그걸 ‘액수’와 연결시켜 말하는 건 어딘지 모르게 면이 서지 않는 일이었다. 그리고 사실 직장인에게 가장 터부시 되는 화제는 ‘연봉’이 아니던가. 익명을 쓰고, 얼굴을 가리고 나서야 액수를 적고, 그걸 애버리지로만 확인할 수 있는 세계에서 나는 내 몸값을 세세히 적어내는 일에 늘 수줍기만 했다.
그런데 이 사업의 세계는 어쩐지 판이 이상하게 돌아간다. 서로의 이름과 얼굴을 훤히 아는 사람들이 사업의 규모와 판의 세팅값을 ‘정확한 숫자’로 얘기하고, 그 적고 큰 숫자의 격차에서 물이 아래로 흐르듯 아낌없이 조언을 쏟아붓는다. 나를 처음 만난 사장님이 빚과 수익의 구조를 상세히 밝히고, 오가는 판돈의 크기를 대화 주제로 삼는다.
연봉의 ㅇ만 나와도 대화가 모호해지는 세계에 있다 온 나는 처음 그 쏟아지는 숫자를 들었을 때, 이 방에 나 아닌 다른 사람이 있는지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싶어 졌다. 으응? 이 사람이 나한테 얘기하고 있는 게 맞나? 내가 이걸 들어도 되는 사람인가? 놀란 표정을 진정시키고 그 숫자의 세계로 들어가면, 거기는 놀랄 만큼 많은 시도와 잠들지 못하는 밤과 혼자 견뎌내는 시간과 어떤 각오가 있었다. 그리고 이 모든 걸 끌고 가는 담대함으로 대부분의 이야기는 끝을 맺는다.
숫자로 얘기해야만 이해되는 마음이 있다는 걸 숫자의 세계에서 배웠다. 내가 쭈뼛쭈뼛 두리뭉실한 이야기를 이어갈 때, 월세와 인건비와 공과금과 원금과 수익과 빚을 이야기하는 사람. 자기 숫자를 먼저 펼치고 내 숫자의 무게에 공감하는 사람. 숫자 사이의 외로움과 숫자 사이의 초조함과 숫자 사이의 깨달음을 나누는 사람. 거기에는 어떤 통쾌함이 있다. 해갈의 짜릿함이 있다.
모바게 창업자 난바 도모코는 한 인터뷰에서 ‘회사를 경영하는 건 아수라장에서 매일 같이 구르는 일’이라고 했다. 도망칠 곳 없이 일에서 부딪쳐가며 만드는 인맥 이외에는 실제로 사업을 할 때 도움이 되는 사람은 없다고도 했다. “자신도 너무 바쁜데 자기 일에서 떨어져 나와 누군가를 도와주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에요.”
사업 8개월 차의 초짜 사장도 저 말은 완벽히 공감할 수 있다. 매일은 한 치 앞이 보이지 않는 아수라장이고 넘어야 할 산이지만, 그 안에서 뒹굴고 부딪혀가며 배우는 것들이 앞으로 나갈 원동력이 된다. 아수라장 안에서 만들어진 관계의 총량은 8개월치의 것이라고 가볍게 여길 수 없다. 사업을 하지 않았더라면 배우지 못했을 법칙을 배우고, 발 담그지 않았을 감정을 느끼고, 받을 일 없었을 도움을 받았다.
그래서 이 적나라한 세계에서는 오늘도 숫자에 대한 대화가 오간다. 숫자에 짓눌린 사람의 손목을 잡아끌고, 앞에 성큼 가는 사람의 숫자를 조심조심 따라 밟는다. 지금은 태어나 처음으로 나와 남의 숫자를 ‘정확히’ 아는 시기이다. 이 세계에는 살아있는 응원이 있다. 생생한 도움이 있다. 진흙탕에서 먼저 굴러본 사람은 넘어진 사람을 그냥 두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