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겁고 투명한 감정,
함께 있기 위한 노력,
돈을 쓰고 시간을 쓰고 에너지를 쓰는 수지타산이 맞지 않는 마이너스,
켜켜이 쌓인 말과 문장,
입맛과 취향을 맞춰가는 시도,
천 번의 울음,
십만 번의 웃음,
삼천이백팔십오일의 주고받음 뒤에도
우리는 여전히 언성을 높인다.
싸우다 못해 서로를 오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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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7월 11일, 우리는 후쿠오카 공항 국제선 도착 게이트에서 처음 만났다. 온라인 상에서만 존재하던 사람을 오프라인에 실물로 구현시키는 날이었다. 사진에서 본 얼굴이 성큼성큼 걸어와 "반가워요." 하고 악수를 청했다.
한 달 전쯤 우리는 블로그 덧글로 서로의 존재를 알았다. 선호가 캄보디아 여행을 준비하며 적은 일기에 같은 코스를 돌아본 내가 덧글로 훈수를 두었다. 알은체를 하며 시작된 대화는 동네와 서로의 일상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졌고,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하루 종일 답글만을 기다리는 내가 있었다. 블로그 답글을 기다리는 하루가 너무 길어 메일 주소를 물어보고, 그 메일의 답장이 애가 타서 스카이프 아이디를 물어봤다. 실시간으로 대화를 주고받고 나서야 조금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한 달을 꼬박 떠들고 나서 선호가 물었다. "제가 후쿠오카에 가면 가이드해주시나요?"
매년 7월에 열리는 야마카사 축제를 구경하는 것이 여행의 목적이었지만, 온천물에 발을 담그고 첫 키스를 하느라 축제 같은 건 꽁무니도 구경하지 못했다.
저가항공의 노예가 되어 후쿠오카와 서울을 오가는 연애는 내가 두바이로 가면서 장거리의 정점을 찍었다. 저가항공에 경유를 더해 서울과 두바이 중간 지점에서 조우했다. 방콕, 발리, 교토, 밴쿠버. 처음 가보는 도시들이 그날의 데이트 장소가 되었다.
서른 번이 넘는 입국과 출국 끝에 동거인이 된 우리는 동거를 하다 못해 사업을 같이 시작했고, 이번 달을 기점으로 함께 보낸 시간은 9년을 넘겼다. 이제는 서로에 대해 모르는 게 없다고 느껴지는, 퇴적된 시간만큼 상대의 몸 구석구석을 훑어 아는 관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오해의 순간을 마주한다.
의도와 다른 말을 내뱉고 의도를 충분히 모른 채 화를 낸다. 의도를 알면 아는 채로 모르면 모르는 채로 싸움은 일상적으로 벌어진다. 대부분의 싸움에 나쁜 사람은 없지만 때때로 우리는 나쁘기도 하다. 상처주기 위한 말을 내뱉고, 앞뒤를 뻔히 알면서 마음을 풀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는 오해한다. 더 독하게 해석하고, 더 크게 억울해한다.
그런데 오늘 문득 선호와 나 사이에도 오해가 있는 것이 아주 커다란 위안으로 느껴졌다. 살면서 선호보다 내 말을 더 많이 들은 사람은 없다. 이렇게 겉과 속을 뒤집어 안에 든 것을 탈탈 털어 보여준 사람도 없다. 엄마는 나를 우연히 낳았지만, 선호는 나를 선택해 낳았다. 나 역시 선호를 선택해 낳았다. 지금 이 관계는 각자의 의지에 의해 태어났다. 남편과 아내의 이름으로 살지만 관계는 절대적이지 않다. 가변의 영역에서 매일은 선택에 의해 이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서로를 오해한다.
그렇다면 살면서 이 많은 오해, 풀리지 않는 의문, 우연한 만남, 어긋난 마음, 밀물처럼 들어왔다가 썰물처럼 사라지는 사람들, 설명되지 않는 헤어짐, 내 옆을 말없이 떠난 사람, 과거로 남겨둔 기억, 그 안에서 우리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건 당연한 일이 아닐까. 수없이 설명하고 이해한 뒤에도 우리는 서로를 오해할 수밖에 없는 게 아닐까. 여름 뒤에 가을이 오는 이치를 진작에 깨우쳤음에도 불구하고 40도의 무더위 속에서는 끝내 이 여름의 끝을 의심하고야 마는. 가을의 선선한 바람 속에서야 가을의 존재를 믿을 수 있는, 그런 우리인 게 아닐까.
그러면 헤어진 인연은 헤어진 채로. 설명되지 않은 마음은 설명되지 않은 채로. 의아한 순간은 의아한 채로. 찰나의 기쁨과 한 순간의 고마움으로. 사랑이라 부르는 우정과 친밀함으로. 인생의 마디마디를 그렇게 잠시 만나 함께 살아가면 되는 게 아닐까. 하루를 만나고 헤어졌으면 헤어진 서러움 대신 그 하루를 남기면 되는 게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니 인생이 한 겹쯤 쉽게 느껴졌다. 한 줌의 이해를 주고받는 사람들이 떠올랐다. 2012년에 만나 2021년을 함께 살고 있는 우리는 여전히 서로를 오해한다. 완벽하지 않은 사랑이 위로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