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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비약을 가진 사람

Anyone born

by 잎새

지병이 있다는 건, 밤사이 새로 생긴 상처와 나아가는 상처를 눈으로 추적하는 것.

물에 닿으면 아플 곳을 미리 확인해 두는 것.


지병이 있다는 건, 알약의 처방 주기를 메모하는 것.

먹지 않은 날을 세던 시기를 지나 먹은 날을 기록하는 지금에 안도하는 것.


지병이 있다는 건, 몸이 아프면 아픈 대로 아프지 않으면 않은 대로 이유를 설명해야 하는 것.

잠잠하던 병이 심해지면, 심해졌던 병이 잦아들면 원인을 찾아야 하는 것.

질문에 답해야 하는 것.


지병이 있다는 건, 갑작스런 외박에 허둥지둥하는 것.

낯선 집의 침구를 두려워하는 것.

밀려드는 가려움으로 먼지의 양을 가늠해 보는 것.

방의 온도와 이불의 부드러움에 그 날의 운을 시험해 보는 것.

다른 이의 화장품을 빌려쓸 때 크게 숨을 들이키는 것.

그럼에도 이 밤을 꼬박 같이 보내고 싶은 사람이 있는 것.


지병이 있다는 건, 내일 아플 걸 알면서도 가끔 무리하는 것.


지병이 있다는 건, 익숙하지 않은 장소에서 피부가 부푸는 것.

낯선 사람 앞에서 다리를 긁는 것.

화장실에서 옷을 벗고 발작이 가라앉기를 기다리는 것.


지병이 있다는 건, 진물과 피를 보지 않고 잠드는 날을 기뻐하는 것.

다른 이의 고통에 내 고통이 겹쳐 보여 부르르 어깨를 떠는 것.


지병이 있다는 건, 이 몸에서 나가고 싶다고 느끼는 것.

이 고통이 현실이 아닐 거라 믿는 것.

이 몸만, 이 살만, 이 육체만 아니면.

가두는 몸에서 벗어나고 싶은 것.


지병이 있다는 건, 그 모든 기도에도 불구하고 똑같은 몸에서 눈뜨는 것.

다음 날 같은 하루를 반복하는 것.


지병이 있다는 건, 재발의 조짐에 덜컥 무서워지는 것.

약한 고통에 지레 겁을 먹고 미리 좌절하는 것.


지병이 있다는 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같은 몸으로 살아가는 것.


만 번의 상처가 생기는 것.


만 번의 상처가 아무는 것.


신체를 부정하는 것.


길고 질긴 부정을 지나, 다시 내가 되는 것.


상처가 지나간 자리마다 가는 주름으로 남아 노인의 손으로 사는 것.


주름진 피부 위에서 살아낸 시간을 읽는 것.


여전히 아픔은 싫은 것.


존재하는 아픔도 나의 일부인 것.


부정하고 긍정한 내가 나로 살아가는 것.


한 사람만큼의 분량을 감당하는 것.


한 사람만큼의 분량으로 기뻐하는 것.


하루치의 용기를 나눠갖는 것.


아프고 아프지 않은 내가 모두 나인 것.


그렇게 다시 평범해지는 것.



오랜 시간 좋아해온 사진 작가 멜멜님(instagram.com/meltingframe)의 연작,

anyone born 프로젝트에 ‘상비약’을 가진 한 명으로 참여하였습니다.


멜멜님의 사진은 ‘흔적’을 이야기하는 10편의 사진, 에세이와 함께

<타인의 삶 2(The Lives of Others 2)>으로 엮여,

텀블벅 후원을 마치고 책으로 출간되었습니다.


다음주 월요일부터 팩토리2에서 출간 기념 전시가 열립니다.


장소: 팩토리2 (서울시 종로구 자하문로10길 15)

전시 기간: 2021년 5월 17일(월) - 6월 6일(일)

관람 시간: 11 - 19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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