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나는 생이 단 한 번의 경험이라는 생각에 강하게 사로잡혀 있다. 지구가 쭉 뻗은 대지처럼 평평한 줄 알았다가 사실은 거대한 공으로 존재한다는 진실을 처음 마주한 기분이다. 머리 위 하늘의 구조를 이해하려 새삼스럽게 올려다보는 사람처럼 생과 사의 원리가 이제와 생경하다. 알고 보니 내 목숨이 단 한 개이고 그래서 한 번 태어난 사람이 한 번 죽게 되어 버리면 생이라 불렸던 시작과 중간이 끝으로 접힌다는 게 놀랍다.
새파란 하늘을 올려다보며 이 '단 한 번의 생'에 대해 생각한다. 우리 아빠는 내가 6살 때 사고로 목숨을 잃은 후, 단 한 번도 내 앞에 나타나지 못했다. 죽음이란 그런 것이다. 살다 보면 대부분 만회의 기회라는 게 생기기 마련인데, 생과 사의 영역에서는 단 한 번의 시도만이 주어진다. 출발한 사람이 어떠한 경로든 끝을 마주하면 거기서 모든 이야기는 수명을 다한다.
다른 한편에서는 '변화'에 대해 생각한다. 36년의 삶을 사는 동안 몇 개의 단계인지 셀 수도 없는 변화의 과정을 거쳤다. 지난 과거를 설명할 때 큰 줄기로 꼽게 되는 순간들이 있지만, 그 줄기 사이사이에 어떤 사소한 갈래길을 걸어왔는지 나만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잘 알고 있다. 1년 전 나는 '나'라는 주어를 붙이기 어려울 정도로 나는 그의 생각에 반대한다. 3년 전 나의 생각 같은 건 듣기도 전에 지루하다. 9년 전의 나는 사람이랄까 한 마리 해파리였던 게 아닐까 의심스러울 정도이다.
그리고 남편이자 동료이자 친구인 '선호'의 변화를 내 것만큼 세세하게 알고 있다. 선호 역시 낙차가 큰 폭의 파도에 휩쓸려왔다. 특히 사업을 시작한 이후에는 생각과 방향성의 변화를 따라잡느라 눈이 핑핑 돌 지경이었다. "우리가 같이 사업을 하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이혼하지 않았을까?" 얼마 전 농담과 진담이 섞인 이야기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튀어나왔다. 아니 진담의 퍼센티지가 더 큰 이야기였다. 이 변화의 폭풍우에 같이 들어와 손을 꼭 잡고 있지 않았더라면 누군가는 원심력을 견디지 못하고 튕겨져 나가지 않았을까. 대체 저 안에서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건지 영영 이해할 수 없지 않았을까.
여기서 이혼에 대한 생각이 이어진다. 내가 유일하게 들여다볼 수 있는 나 개인의 성향과 시야는 시시각각 그 색채와 흐름이 변하고 있어 이미 1년 전의 생각조차 치기 어린 면면을 발견한다. 지금의 생각 역시 몇 년 후, 혹은 6개월만 흘러도 동의할 수 없게 될 거라는 걸 안다. 그렇다면 20대, 30대의 어느 시점에 결혼이라는 것을 결심하고 그 대상으로 정한 사람과 40대, 50대, 60대까지 관계를 이어간다는 건 어딘가 이상한 일이 아닐까. 오히려 생의 주기에 따라 그때의 흐름과 속도에 맞는 사람을 만나 결혼과 이혼을 반복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반응 아닐까. 직업이 바뀌고 좋아하는 것이 바뀌고 친구가 바뀌고 사는 곳이 바뀌고 내가 진실이라 여기던 것들이 더 이상 진실이 아니게 되어가는데, 10년, 20년 전에 정한 파트너만은 쭉 똑같은 사람이라는 건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리고 생은 단 한 번의 시도이다. 내가 경험할 수 있는 이 한 번의 생은 80년대에 한국에서 태어난 여자로 설정되어 그간 36년 치의 경험을 소진했다. 중요한 건 아빠가 목숨을 잃은 나이가 34살이었다는 거다. 죽음이 지금으로부터 50년 후에 찾아온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을까? 나는 운 좋게 살아서 30대 후반에 들어섰지만 40이 되기 전 생의 '끝'을 마주할지도 모른다는 걸 누가 부인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이 단 한 번의 생에 겪는 단 한 번의 결혼. 단 한 번의 대상. 단 한 번의 결정. 그 안에서 두 개인이 지향하는 성장 속도와 방향이 맞지 않는다면 생의 주기에 따라 이혼이라는 결론에 가닿는 것이 내 하나의 인생과 파트너가 가진 하나의 인생을 위한 최선의 결정 아닐까? 감정의 싫고 좋음을 떠나, 나쁘고 착함을 떠나, 환경과 처지를 떠나, 무조건 평생 변하지 않는/변할 수 없는 결정처럼 인위적이고 부자연스러운 일이 있을까.
선호와는 운이 좋게도 10년의 시간 동안 비슷한 속도로 여기까지 걸어왔다. 사람도 인생도 완벽하지 않기에 숱한 오르막과 내리막을 만났다. 그 안에서 같이 주저앉아 있거나 먼저 앞장서거나 업고 걸어 주거나 했다. 업고 업히는 경험에서 내가 아닌 타인의 인생에 농밀하게 녹아들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그리고 이 모든 경험에도 불구하고 언젠가 인생의 행보와 결이 어긋나게 되면 특별한 미움도 절망도 없이 자연스러운 이혼을 맞이하게 될 거라고 생각한다.
다행히도 나는 10년 전 해파리 같던 선호보다 지금의 인간 선호가 좋다. 앞으로도 우리가 인간일 수 있기를 희망한다. 남편과 아내의 이름으로 살지만 아무것도 정해진 것은 없고, 모든 것은 선택의 영역임을 기억한다. 단 한 번의 생에 만난 이 관계, 이 시간이 그만큼의 값어치를 해내길 바란다. 서로의 사랑이 당연하지 않고, 내가 걷는 만큼 네가 잘 따라왔는지를 부지런히 확인해가면 아마도 변화에 따른 필연적인 이혼은 조금 더 뒤로 미룰 수 있지 않을까. 언제든 끝을 낼 수 있는 관계를 오늘도 이어가는 기쁨. 단 한 번의 생에 있는 단 한 번의 오늘. 오늘치의 의지로 선택하는 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