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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잎새 Jun 03. 2022

흥분의 쓸모

엄마가 걸어온 전화에 두서없는 근황을 주고받던 오후였다. 밋밋한 얘기를 늘어놓던 내가 물었다. “그래서 엄마는 요즘 어떻게 지내?” “나? 엄마는 글쎄... 모르겠어. 아니, 사실 잘 알아.” 어쩐지 연극적인 첫마디였다. 머뭇거리다가 이내 확신에 찬 서두를 뗀 엄마가 달뜬 목소리로 이야기를 이었다. “엄마는 학교에 다니니까… 아침에 일어나면 흥분된 기분으로 눈을 떠. 작게. 작게 흥분된 기분. 내가 그게 느껴져.” 나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61살 엄마는 매일 설레는 아침을 맞이한다고 했다.


"학교는 8시 반부터 시작인데, 엄마는 보통 새벽 4시면 일어나서 1시간 일찍 학교에 도착해. 천천히 준비하고 아침도 챙겨 먹고 6시 반이면 집에서 출발해. 구로세무서까지 운동할 겸 걸어가서 거기서 버스 타고 가거든. 그러면 걸어가면서 생각해. 아, 나는 너무 행복한 사람이다."


하루의 높낮이에 휘청거리고 막연한 지지부진함에 젖어있던 시절이라, 아침에 일어나면 흥분된 기분을 느낀다는 엄마의 말에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그리고 한동안 엄마의 말이 뒤통수에 따라붙었다. "아, 나는 너무 행복한 사람이다." 이 말이 터져 나온 게 언제였더라? "작게 흥분된 기분. 내가 그게 느껴져." 그렇게 하루를 산 게 언제였더라?


엄마 학교의 한 동급생은 남편 친구들과의 모임에서 노래방에 가자는 청이 그렇게 싫었다고 했다. 글자를 읽지 못해서 노래방에 갈 수 없다는 말을 끝내 하지 못한 여자는 갖은 핑계를 만들어 늘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부인 때문에 덩달아 2차에 끼지 못한 남편이 왜 맨날 분위기를 깨냐며 화를 내는 통에 싸운 적도 많았다고 했다.  


"그럼 글씨 못 읽는다는 말을 남편한테 못 한 거야?"

놀라서 묻는 내 질문에 엄마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대꾸했다.

"그런 거 말 못 하는 사람 부지기수야. 지금도 학교 다니는 거 가족들한테 숨기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그렇게 평생 글씨를 읽지 못한 채 살아온 동급생은 초등학교를 검정고시로 졸업하고 중학교에 들어왔다. 그날은 여자가 팝송 경연대회에 나온 날이었다.

"나는 노래 부르는 걸 정말 좋아합니다." 운을 뗀 여자가 말을 이었다.

"그런데 글씨를 못 읽어서 노래방에 가지 못 하는 게 너무 슬펐어요." 그리고 여자는 영어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강당에 모인 늙은 학생들이 하나 둘 눈물을 찍어냈다.


고등학생이 되면서 공부가 점점 어려워져 엄마 학교 학생들은 머리가 지끈지끈하다. 특히 수학 시간이 되면 아줌마들의 곡소리가 터져 나온다고 했다. 재귀 함수에 무리수, 유리수가 날아다니는 칠판을 보며, "아우, 선생님 이걸 배워서 어디다 써요?" "그냥 곱셈 뺄셈만 잘하면 되는 거 아니에요?" 토로한다. 그런데 엄마는 수학이 제일 재밌다고 했다.

"수학은 답이 딱 떨어져서 좋아. 기분이 상쾌하고 문제 풀 때마다 짜릿해. 영어는 좀 싫어. a를 '아'라고 읽었다가 어떨 때는 '애'라고 했다가 또 '어'라고 했다가. 엄마한테 영어는 좀 변덕쟁이 같아. 그런데 수학은 아니잖아. 수학은 언제나 내 옆에 있어주는 성실한 친구 같아."


엄마는 수학에서 어떤 아름다움을 발견한 듯하다. 도무지 어디에 쓸지 모르겠는 공부를 하며 작은 흥분에 휩싸인 채 아침을 맞이한다. 쓸모가 있어서 하는 게 아닌 아름다워서 하는 공부. 영어로 노래를 부르고 켤레 복소수를 찾아내는 하루.


일을 쉬는 동안 매일 정확히 주어지는 24시간을 펑펑 흔들어 썼다. 하루에 두 끼를 먹고, 책이 하는 말을 듣고, 선호와 걷다 보면 하루가 갔다. 그 무용하고 낭비하는 듯한 일상에서 종종 재귀 함수를 공부하는 엄마를 떠올렸다. 나도 이제 하루를 기대하는 일이 무엇인지 알 것 같다. 쓸모없는 것의 아름다움. 어디에도 사용하지 않는 사치. 누구의 인정도 필요 없이, 순전히 그 과정만을 즐기는 시간. 용도 없는 시간을 통과하는 동안 물렀던 마음이 땅에 떨어지고 그 자리에 새싹이 자라는 것을 보았다. 영어로 부르는 노래와 다항식의 내림차순처럼. 없어도 되지만, 있어야만 삶이 아름다워지는 것들. 삶이 아름다울 때, 비로소 채워지는 힘.


언젠가 엄마가 멀리 가기 위해 가벼워지겠다고 했다. 그 말의 의미가 지금은 생생하게 이해된다. 마음에 달라붙어 있는 것들을 떨쳐내는 시간이구나. 멀리까지 걸어가려고 채비를 가볍게 하는 시간이구나. 그렇게 마음을 들여다보며 매일의 변화를 이해한다. 채소와 과일을 챙겨 먹고 허벅지로 힘껏 달리고 어깨에 힘을 풀어 가슴을 활짝 연다. 그리고 작게 흥분된 기분. 지금은 그거면 됐다. 의미도 목적도 없이 그 자체로 유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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