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uilding in Public
통장을 박박 긁어보니 두 사람이 생활하면서 잔고가 0원까지 떨어지는 데는 넉넉잡아 8개월. 이 시간 동안 내가 그리고 네가 뭘 할 수 있을까. 뭘 하고 싶을까. 왜 해야 할까. 어떻게 할까. 누구랑 할까. 모든 것이 미정인 채 갭이어만을 결정한다. '갭이어'라니, 대체 누가 이런 기특한 단어를 만들었지?
2년 동안 남편과 '볼하우스'라는 볼링장을 운영했다. Time Well Played. 한 문장의 슬로건을 붙잡고, 좋은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공간을 만들기 위해 안팎의 노력을 더했다. 사업의 ㅅ도 모른다는 낡아빠진 표현이 하나도 과장이 아닐 만큼,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로 시작한 덕에 셀 수도 없이 많은 걸 배웠다.
그리고 올해 3월, 2년의 시간을 정리했다. 당연히 이직이 결정된 곳은 없었다. 소속도 대책도 없이 두 사람이 동시에 백수가 되고 3개월을 꼬박 쉬었다. 사업을 정리하는 일은 퇴사보다 더 많은 감정을 동반했다. 먹고 자고 먹고 걸으면서 생산적인 일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으로 시들었던 마음이 조금씩 회복됐다. 기운이 차려질수록 있는 줄도 몰랐던 감정들이 하나 둘 표면 위로 떠올랐다. 내 안에 이런 생각이 있었구나, 들여다보며 형태를 이해한다. 아무 일도 하지 않는 덕에 갖가지 색깔과 무게를 가진 마음을 찬찬히 바라볼 수 있었다. 별다른 노력을 하지 않아도 들여다보는 것만으로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다. 존재를 인정받은 감정들이 하나 둘 제자리를 찾아 흩어졌다. 그 시간을 지나는 동안 어떤 씨앗의 존재가 느껴졌다. 아직 이름표가 붙지 않은 씨앗은 발아할 때를 기다리는 듯했다. 얼굴을 모르는 씨앗에 싹이 트고 나면 그때 새로운 일을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3개월쯤 지났을 때, 그 씨앗이 어떤 열매인지 알지 못한 채, 지인의 부탁으로 일을 시작했다. 2개월 동안 손발을 맞추어 보니 서로가 원하는 방향이 다르다는 걸 확인했다. 더 늦은 결정이 되기 전에 자리를 정리하고, 한 뼘 더 배운 상태로 다시 출발점 앞에 선다. 통장을 긁어모아 0들을 나열하고 최소 생활비로 나눠본다. 헝클어진 생각과 시간을 풀어보니 '갭이어'라는 단어로 방향이 정리됐다.
"더 길게 일하려면, 왜 일하는지 알려면, 우리가 각자 이 시간을 가져야 하는 거 같아. 언제까지 일지는 모르지만, 이걸로 한동안 버텨볼까?"
코로나 한복판에서 볼하우스를 하면서 9개월 동안 수입이 0원인 시간을 겪어봤다. 저금을 활활 태워보는 건 이미 해봐서 익숙하다. 뭐든 처음이 어렵지 두 번이 대수인가.
사람들과 함께 목장 생활을 시작할 때는 자급자족이니 하는 거창한 이론에 심취해 있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런 이론이 지겨워졌다. 내가 왜 양을 키우며 사는지를 굳이 나 자신에게 설명할 필요는 없다. 닥친 일을 하는 것뿐이다. 양이 도망가면 안 되니까 울타리를 치고, 양이 배고프면 안 되니까 풀을 준다.
- 악셀 린델, <사랑한다고 했다가 죽이겠다고 했다가>
스톡홀름에서 문학 강사로 살아가던 악셀 린덴은 아버지의 목장을 물려받고 2010년부터 양을 키우기 시작한다. 양들은 끊임없이 탈출을 시도하고, 주인을 들이받으며, 축사는 늘 어딘가 고장 나있다. 울타리의 구멍을 막고, 건초를 깔고, 양의 출산을 돕는 일상이 이어진다. 이 책은 온통 양을 키우는 일에 관한 내용이지만, 누군가의 직업에 대한 이야기가 늘 그렇듯, 양을 키우는 노동은 세상을 관찰하는 시선으로 이어진다. 양을 "사랑한다고 했다가 죽이겠다고 했다가"를 반복하며 문학 강사는 목축민이 되어간다.
애지중지 기른 양을 도축하고, 다시 출산을 통해 양의 무리를 키워가는 이 책의 제목은 일을 대하는 내 감정과 어딘가 닮아있다. 일과 열렬한 사랑에 빠졌다가, 어느 날은 죽이겠다고 하며 살아왔다. 이게 비단 나에게만 해당되는 감정일까. 일을 빼놓고는 일상을 설명할 수 없는 주위의 친구들 역시 일에 대한 사랑과 죽음의 타령을 숱하게 반복하며 살아간다. 이 감정은 어딘가 비이성적이고, 일은 인격이 아니기에 우리의 사랑에 적절한 답장도 보내주지 않으며, 일과 사랑에 빠지는 행위 같은 건 지는 싸움에 걸어 들어가는 일인 것 같아 어딘가 수치심이 느껴질 때도 있다. 그런데 얼마 전, 제현주 님의 <내리막 세상에서 일하는 노마드를 위한 안내서>에서 이런 문장을 만났다.
“일을 열렬히 사랑해서 결국 해피엔딩을 쟁취해내는 스토리가 내 것이 될지도 모른다는 일말의 희망을 떨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적어도 해피엔딩을 바라는 바보가 너 하나만은 아니라고 이 책은 말한다.
한나 아렌트는 <인간의 조건>에서 인간의 활동을 노동, 작업, 행위로 나눈다. 노동은 생물학적 존재인 인간이 먹고살기 위해 필연적으로 해야 하는 활동이다. 작업은 유용한 것을 창조하고픈 욕구에서 나온다. 행위는 타인의 현존 앞에서 생각을 말하고 실천하는 행위로써, 타인으로부터 인정받고픈 욕구에 응답한다. 고대 아테네에서 노동은 노예의, 작업은 장인의, 행위는 귀족의 몫이었다. 각 활동에 투사하는 세 가지 욕구를 모두 해소하며 살아갈 수 있었던 사람은 귀족뿐이었다. (...) 우리는 이 세 가지 활동의 구분이 사라진 시대에 살고 있다. 우리는 먹고살기 위한 욕구를, 창조하고픈 욕구를, 인정받고 싶은 욕구를 일 하나로 해결해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
노동자인 나는 일 하나로 먹고살면서 창조하고 인정까지 받아야 하기에, '일과 열렬한 사랑을 한 끝에 해피엔딩에 도달하는 미래'를 그리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해피엔딩이 흔한 결말이라면 굳이 이름도 붙여지지 않았을 것이기에, 그 쉽지 않은 미래를 현재로 만들지 못하고, 어느 날은 일을 사랑한다고 했다가 어느 날은 죽이겠다고 하며 갈팡질팡 하는 마음을 숨기지 못한 채 노동의 현장에서 살아왔다.
그렇게 회사원으로 살아온 10년, 사업에 발을 들여본 2년 그리고 지금. 이제는 일과 나의 관계를 타자화하고, 불균형한 부분을 정리해볼 때다. 일에게 내 몫의 인생을 80% 정도 내맡기고 직장과 먹고사니즘이 만드는 상황에 휘둘리며 씁쓸한 이력과 옅은 자부심으로 일을 정의했다. 이제는 돈을 버는 일, 시간을 써서 하는 일은 인생을 탐구하는 행위 그 자체라는 생각이 든다. 직업을 가지고, 직장에 소속되고, 주임 대리 과장을 거쳐 팀장의 연봉을 받거나, 한 방의 엑싯을 바라는 것으로는 삶의 가치가 명확히 설명되지 않는다. 어떤 방식을 통해 돈을 벌고, 어떤 일에 시간을 쓸 때 그 행위를 납득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답을 쥐어주기 위해 가용 가능한 시간은 최대 8개월. 그래서 인생을 탐구하기 위해 뭘 할 거냐고? 그걸 도통 모르겠으니 매일 읽고 만나고 달리고 쓰는 수밖에 없다. 오늘은 공공의 장소, 빛이 드는 장소에 생각을 꺼내 말린다. 매일이 실험의 연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