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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의 책

사랑한다고 했다가 죽이겠다고 했다가

by 잎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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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은 다시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지끈거리게 바쁜 달이었다. 마감과 연습으로 꽉 찬 달력을 소화하는 동안 출근과 퇴근을 꾸역꾸역 해치웠다. 매일 밤 자정을 넘겨서야 침대에 겨우 몸을 눕히고 끙끙 앓아누웠다. 앓는 중에도 밀린 일과 내일의 일정이 줄줄이 나를 채근했다. 그 와중에 출장도 갔다. 3박 4일의 도쿄행을 앞둔 나는 죽을상을 하고 있었는데, 기분 전환이나 할 겸 들린 프리마켓에서 우연히 이 책을 만났다. 양 치는 사람이 건초 더미를 뒤집으며 사랑한다고 했다가 죽이겠다고 한다. 264번 양이 다리를 저는지 안 저는지 궁금해하는 동안, 3월 중 유일하게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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ㅡ37

추워지면 물이 얼지 않게 수도관을 살핀다. 바람이 불면 축사 문짝이 떨어져 나가지 않게 손본다. 비가 오면 우비를 챙긴다. 풀잎 색깔이 변하면 슬슬 겨울용 사료를 준비한다. 이런 모든 것 속에 근원적인 아름다움이 존재하리라 믿으면서.


ㅡ51

하지만 우리가 살면서 하는 일이 전부 합리적일 수는 없잖은가.


ㅡ60

시골에 살면 교제할 기회가 적어 외로울 것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내가 만나는 상대는 양들이다.

교제냐 아니냐를 결정하는 것은 얼마나 자주 만나느냐가 아니다. 어떤 상대를 만나느냐가 더 중요하다. 다시 말해 나와 상대가 서로 동일시하기를 원하는가, 우리가 서로를 비추는 거울이 될 수 있는가가 중요하다.

사교의 기회는 시골이나 도시나 별반 다르지 않다.

시골에 처박힌 내가 만나는 상대는 양들이다.


ㅡ91

헌신이라면 헌신인데 헌신의 대가가 뭐냐고 물으면 잘 모르겠다. 양고기? 양털? 그보다는 헌신하는 삶 그 자체가 대가라고 하는 편이 맞겠다. 어떻게 하면 충만한 삶을 살 수 있을까 같은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 삶을 꽉꽉 채워 주는 녀석들이 200미터 앞 방목장에 살고 있다.


ㅡ106

보살펴 주어야 하지만 끼어들어선 안 된다.


ㅡ134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을 보면, 큰 변화도 없고 별 재미도 없다. 눈부신 장면도 없고 신바람 나는 순간도 없다. 그럼 글도 재미없게 써야 할까?


ㅡ195

요즘에 나는 세상만사가 일종의 시라고 생각한다. 큰까마귀가 깍깍 울고 있다. 아니, 뭔가를 말하고 있다.

큰까마귀는 수명이 길다. 저 녀석이 나보다 나이가 많을지도 모른다. 그동안 우리 목장의 변천사를 지켜보았을지도 모른다. 방목장에 와서 죽은 새끼 양을 뜯어먹은 것이 저 녀석일지도 모른다.

저절로 생겨난 이 생존이라는 시는 누구의 인정도, 허락도 구하지 않는다. 작가도 없고 독자도 없는 시, 그저 살아갈 뿐 언어나 사유에 구애받지 않는 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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