百의 그림자
번갈아 그림자가 일어서는 이 소설을 읽으면서 별다른 위화감을 느끼지 못했다. 그림자가 일어서는 순간의 서늘한 감각이 오히려 익숙하게 떠올랐다. 살면서 이런저런 사정을 겪었는데 그림자 정도, 솟구치지 않을 수가 있겠냐는 여 씨 아저씨의 말처럼. 한 번도 본 적 없지만, 어젯밤 꿈처럼 또렷한 그림자들의 이야기를 따라간다.
일어섰나요?
일어섰지, 나도.
여 씨 아저씨가 새삼스럽다는 듯 눈을 깜박이며 나를 보았다.
반짝 일어서는 그림자. 그림자를 업고 집으로 돌아온 사람. 그림자에 발이 걸려 넘어진 사람. 엄청나게 부풀어 오른 그림자의 머리가 그녀 쪽으로 기우는 순간. 어차피, 어차피 라고 말하는 그림자. 차마, 차마, 하고 따라오는 목소리.
종잇장처럼 얇고 맥없을 거라고 생각했으나 막상 만져 보니 그렇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어떤 느낌이라고 딱 말할 수 있는가 하면 그도 아닌 게 애매했다. 갓 솟아오른 그림자란 그토록 애매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반 뼘쯤 솟은 그림자의 이야기에 내 그림자가 스륵 일어서던 기억이 섞여 들어간다. 어차피, 어차피 라고 말하던 사람이 나인지, 내 그림자였는지 경계가 흐릿해진다. 거울을 보고 일어선 그림자를 확인하던 순간이 지금 떠올려도 여태 서럽다. 그렇다고 서러운 일을 내내 붙잡고 살까. 한 뼘 일어선 그림자를 다독여 마음에 품고, 더는 일어서지 않으리라 믿고, 잠잠한 그림자에서 불길한 태동을 느끼는 것은 바보 같은 일로 치고, "갑시다."
나는 내 손을 당겨 걷는다. 너풀너풀 힘없이 걷는 내 등을 뒤에서 큰 손이 민다. 미는 힘을 받아 더 앞으로 간다. 길을 잃은 숲에서도 자꾸 걷다 보면 밖으로 나오게 된다. 따라오는 그림자 같은 것은 전혀 무섭지 않은 밤. 노래할까요, 다정한 사람이 말을 건다.
ㅡ 13
은교 씨, 하고 무재 씨가 말했다.
정말로 죽을 생각이 아니라면 아무렇게나 죽겠다고 말하지는 마요.
ㅡ30
그림자가 일어났다고 말하자 여 씨 아저씨는 눈을 깜박였다.
그래서 어떻게 했나.
따라갔어요.
따라갔나.
조금 따라갔어요.
따라가지 말았어야지.
그러지 않으려고요.
암.
ㅡ39
또 무엇을 좋아하나요.
이것저것 좋아하는데요.
어떤 것이요.
그냥 이것저것을.
나는 쇄골이 반듯한 사람이 좋습니다.
그렇군요.
좋아합니다.
쇄골을요?
은교 씨를요.
...... 나는 쇄골이 하나도 반듯하지 않은데요.
반듯하지 않아도 좋으니까 좋은 거지요.
ㅡ46
요즘도 이따금 일어서곤 하는데, 나는 그림자 같은 건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는 거야. 저런 건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생각하니까 견딜 만해서 말이야. 그게 실은 아무것도 아닌 것은 아니지만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니까 가끔은 아무것도 아닌 것 같고, 시간이 좀 지나고 보니 그게 정말 아무것도 아닌 것이 맞는 것 같고 말이지. 그림자라는 건 일어서기도 하고 드러눕기도 하고, 그렇잖아?
ㅡ91
거기도 정전인가요?
네.
어두워요, 여기도,라고 해 놓고 한동안 말이 없었다.
은교 씨, 하고 무재 씨가 말했다.
왜 울어요.
안 우는데요.
우는데요.
내버려 두세요.
(......)
무재 씨, 하고 내가 말했다.
네, 하고 무재 씨가 말했다.
끊지 마요.
안 끊어요.
ㅡ114
언제고 밀어 버려야 할 구역인데, 누군가의 생계나 생활계,라고 말하면 생각할 것이 너무 많아지니까, 슬럼, 이라고 간단하게 정리해 버리는 것이 아닐까.
ㅡ132
은교 씨, 하고 무재 씨가 말했다.
나는 어젯밤에요, 그림자에 발이 걸렸어요.
ㅡ143
나는 그 앞에서 그것들을 들여다보며 이런 것들 때문에 죽는구나, 사람이 이런 것을 남기고 죽는구나, 생각하고 있다가 조그만 무언가에 옆구리를 베어 먹힌 듯한 심정이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는 이야기예요.
ㅡ166
목덜미를 당기는 듯한 어둠을 등지고 무재 씨 쪽으로 걸어갔다. 손을 잡아 보자 손이라기보다는 무언가의 뼈를 잡은 것처럼 메마르고 차가웠다. 그렇더라도 이것은 무재 씨의 뼈,라고 생각하며 간절하게 잡고 있었다.
무재 씨.
무재 씨.
걸어갈까요?
ㅡ168
따라오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따라오는 그림자 같은 것은 전혀 무섭지 않았다.
ㅡ169
은교 씨.
하고 무재 씨가 말했다.
노래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