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서서 자각하세요 ㅡ 결국 내가 할 일입니다
점심을 먹고 30분 현장 앞 시골길을 걷는다. 오늘은 비, 주황색 우산을 들었다. 아침에 나는 겨자색 니트에 남색 바지를 주워 입었는데, 주황색 우산까지 더해지니 알록달록 운전자 눈에 잘 띄게 생겼다. 우산 위로 투둑 투둑 비 떨어지는 소리가 듣기에 좋다.
정문에서 이백 미터쯤 걸으면 포도밭이 나온다. 지지대를 받쳐놓은 포도넝쿨 사이로 한 송이씩 종이에 쌓인 포도송이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넝쿨이 얼마나 더 무성해졌는지, 본다고 가늠하지도 못하면서 짐짓 진지한 표정으로 내려다본다.
아까부터 머리 위로 새소리가 따라온다. 어쩐지 아는 목소리 같아 들리는 말을 한글로 바꿔보았더니 ‘뻐꾹뻐꾹’ 적혔다. 뻐꾸기는 다른 새의 알을 밀어내고 큰다던데, 저기 우는 뻐꾸기 목소리가 저렇게 커질 동안 어떤 새가 새끼를 대신해 먹이를 날랐을까. 어릴 적 티비에서 봤던, 등으로 다른 새의 알을 밀어내는 뻐꾸기 새끼의 모습이 떠올랐다. 다시 길을 걷는다. 천장이 낮은 시골 집들이 줄줄이 붙어있다. 한자로 적힌 현판을 천천히 읽어보니 경로당이라 쓰여있다. 초록색 대문에서 몸빼 바지를 입은 여자가 불쑥 나와 밖으로 뭔가를 휙 던지고 들어간다. 지나가며 곁눈질을 하니 한 입 베어 문 살구가 떨어져 있었다. 아직 떫었던 걸까. 보기에는 여문듯한, 살구색을 띤 살구를 보니, 살구색을 살구색이라 이름 진 누군가가 탁월했다는 생각이 든다.
어느 집 담장에는 봉숭아 나무가 조르륵 심겨있다. 꽃이 피지 않았으면 봉숭아 나무인지 몰랐을 테다. 외할머니 시골집 마당 한켠에 똑같이 생긴 봉숭아 나무가 심겨 있었다. 여름이 되어 빨간 꽃잎들이 피어나면 백반을 넣고 빻아 손에 물을 들였었다. 짓이겨진 꽃잎과 백반 알갱이가 섞인 것을 손톱 위에 듬뿍 올리고 비닐로 조심조심 말아 실로 꼭 묵었다. 하룻밤을 기다려야 주황색 물이 든다기에, 열 손가락에 비닐을 감은 채로 이불에 눕는다. 요 위에 살며시 손을 올려놓고 누우면 유독 꽉 묶인 손가락이 저릿저릿 아파왔다. 어떤 색이 나올지 상상하는 것으로 불편함을 달랬다. 결과를 기다리며 설레던 그 밤은 유독 길게 느껴져, 이대로 영영 아침이 오지 않을 것만 같기도 했다. 날이 밝으면 까무룩 잠든 눈을 뜨자마자 손부터 살펴본다. 밤새 뒤척이는 통에 빠져버린 비닐봉지들이 이불 위를 뒹굴고 있었다. 봉숭아 물이 빠져나와 흰 이불 군데군데 꽃물이 들기도 했다. 버텨준 손가락 위 비닐들을 급하게 풀면 쪼글쪼글해진 손 끝에 주황색 물이 들어있었다. 묶여있던 손가락에 피가 돌면서 손 끝이 싸하게 저려왔다. 손톱도 손가락도 온통 불그스름한 것이 어린 마음을 설레게 했다. 몇 주 지나 그 붉은 물이 서서히 옅어지면 서운한 마음에 몇 번이고 손 끝을 확인했었다.
이제는 봉숭아 나무를 보고 사진을 찍는 것으로 여름을 대신한다. 손가락을 감싸고 하룻밤을 기다려 주황색 손톱을 얻어내기에는 턱없이 인내심이 부족해졌다. 아니 이제 백반을 팔기는 하는지, 투명한 그 결정들을 꽃잎과 함께 빻아 손톱 위에 올리던 순간이 까마득하다. 손톱 끝 붉은 물을 생각하며 걷다 보면, 시골집과 낮은 빌라가 섞여 있던 길이 갑자기 탁 트인 공간으로 이어진다. 눈 앞에 넓은 논이 펼쳐져 있다. 모내기가 끝났는지, 빼곡히 벼가 심긴 논을 한참 서서 쳐다본다. 길은 저 멀리, 굽이굽이 등성이 너머로 넘어간다. 나는 30분의 여유를 가진 사람이라 이 이상은 걸어본 적이 없다. 벼의 키를 가늠해보고 등을 돌린다. 다시 같은 길을 걸어 돌아간다. 우산 위 비, 투둑 투둑 투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