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그날 이후로도, 아무 일 없던 듯 일상은 흘러갔다. 사무실 문은 같은 소리를 내며 열렸고, 컴퓨터는 늘 같은 위치에서 켜졌다. 메일은 쌓였고, 사건은 평소처럼 흘러갔다.
겉으로 보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이미 어떤 감각이, 되돌릴 수 없게 바뀌어 있었다는 걸.
AI가 내 옆자리에 앉았던 그날 이후, 나는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화면을 바라볼 수 없게 되었다. 문장을 쓰기 시작하면, 어김없이 하나의 생각이 따라붙었다.
‘이 정도 문장이라면, 굳이 내가 아니어도 되지 않을까.’
이 생각은 조용했다. 너무 조용해서 오히려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마치 오래된 가구를 하나 치운 뒤 생긴 빈 공간처럼, 처음엔 잘 느껴지지 않다가 어느 순간부터 계속 시선이 가는 그런 공백이었다.
나는 12년 동안 이 일을 해왔다. 신입 시절에는 문장 하나를 쓰는 데도 시간이 오래 걸렸고, 법 조항을 이해하는 데 며칠이 걸리기도 했다. 사수변리사가 고쳐준 빨간 줄 하나하나를 곱씹으며 밤을 보내던 시간도 있었다.
그 시간 동안 나는 조금씩 나만의 리듬을 만들었고, 어떤 표현을 쓰고 어떤 표현을 피해야 하는지 몸으로 익혔다. 그게 ‘경력’이라고 믿어왔다.
그런데 AI는 그 시간을 건너뛰었다. 설명도 필요 없었고, 시행착오도 없었다. 결과만, 아주 조용하게 가져왔다.
처음이었다. 그 어떤 기술보다, 이 조용한 결과가 나를 무력하게 만든 건.
AI는 나보다 더 오래 일하지 않았다. 야근도 하지 않았고, 실패로 밤을 보내지도 않았다. 그런데 결과만 놓고 보면, 내가 쌓아온 시간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였다.
그때 처음으로 이런 생각이 들었다.
경력이란 무엇일까. 시간의 총합일까, 아니면 그 시간을 통과하며 남은 감각일까.
나는 문득, 존재가 흐려지는 감각이 이런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해고를 당한 것도 아니고, 누군가 내 자리를 노골적으로 위협한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분명히, ‘없어져도 되는 존재’가 되어가는 감각은 있었다.
AI는 나를 밀어내지 않았다. 그저 옆에 앉아 있었을 뿐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나는 점점 화면 밖으로 밀려나는 기분이 들었다.
그날 밤, 집에 돌아와 노트북을 열었지만 좀처럼 글이 써지지 않았다. 문장을 시작하려 하면, 이미 어딘가에 완성된 답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먼저 떠올랐다. 그 생각은 나를 더 조용하게 만들었다.
사람은 ‘불필요하다’는 감각 앞에서, 가장 먼저 침묵한다.
나는 그 침묵 속에서 내가 언제부터 ‘필요한 존재’가 되려고 애써왔는지 돌아보게 되었다. 클라이언트에게, 조직에게, 시스템에게.
그런데 AI 앞에서는, 필요함이라는 기준 자체가 무너져버렸다. 필요함과 불필요함을 가르는 선이 너무 쉽게 그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나는 그제야 실감했다.
그날 이후로, 나는 종종 일부러 AI를 켜지 않았다. 기술을 거부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내가 아직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인지 확인하고 싶어서였다.
아무 도움 없이 문장을 써 내려가다 보면, 예전보다 더 자주 멈추는 나를 마주하게 된다. 망설임은 늘었고, 확신은 쉽게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그 느림 속에서, 이상하게도 ‘나’라는 감각이 조금씩 돌아왔다.
AI는 결과를 만든다. 나는 그 결과를 의심한다. 그 의심은 불신이 아니라, 책임을 지기 위한 준비에 가깝다.
그날 이후로 나는 깨닫기 시작했다. AI가 복제한 것은 내가 쌓아온 시간의 ‘결과’이지, 그 시간을 지나오며 생긴 ‘감각’은 아니라는 것을.
경력은 기록이 아니다. 그것은 판단의 습관이고, 책임의 흔적이다.
어디까지 밀어붙여도 되는지, 언제 멈춰야 하는지, 어떤 말은 끝내 쓰지 않아야 하는지에 대한 판단은 어디에도 명시되어 있지 않다. 그 판단은 언제나 사람의 몫이었다.
나는 아직도 가끔, ‘정말 내가 아니어도 괜찮은 걸까’라는 생각을 한다. 이 질문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아마도 이 시대를 사는 대부분의 사람이, 한 번쯤은 마주하게 될 질문일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의 나는, 이 질문을 덮어두지 않기로 했다. 사라질 수 있다는 감각을 인정한 채, 그 위에 다시 나를 세워보기로 했다.
AI는 계속 발전할 것이다. 더 많은 일을 대신할 것이고, 더 많은 시간을 절약해 줄 것이다. 그럴수록, 사람은 스스로에게 더 자주 물어야 한다.
나는 지금, 무엇 때문에 이 자리에 앉아 있는가. 그리고 이 자리는, 정말 아무나 앉아도 되는 자리인가.
내 경력이 하루 만에 복제되었을 때, 나는 처음으로 ‘존재’라는 단어를 직업과 분리해서 생각하게 되었다.
어쩌면 이 시대의 일은, 유능함을 증명하는 싸움이 아니라 지워지지 않기 위해 스스로를 정의하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나는 아직 나를 완전히 정의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 질문 앞에, 멈춰 서는 법은 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