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보다 판단이 많은 사람이 되어버렸다

3화

by 이민주

AI와 함께 일하기 시작하면서, 나는 내가 매일 얼마나 많은 ‘판단’을 하고 있었는지를 처음으로 자각했다. 이전에는 일을 ‘만드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문장을 쓰고, 구조를 짜고, 요건을 맞추는 사람이라고 여겼다.


손이 먼저 움직였고, 머리는 그 손을 따라갔다. 판단보다 생산이 먼저였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AI가 문장을 대신 만들어주기 시작하면서, 내 일의 중심은 조금씩 이동했다. 나는 더 이상 처음부터 끝까지 만들어내는 사람이 아니라, 수없이 제시되는 선택지 앞에서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지울지 결정하는 사람이 되었다.


AI는 항상 여러 개의 답을 내놓는다. 어떤 문장이 더 깔끔한지, 어떤 구조가 더 그럴듯한 지, 어떤 표현이 일반적인지를 빠르게 제안한다.


그럴수록 나는 점점 이런 질문을 더 자주 던지게 되었다. 이 중에서 ‘가능한 답’이 아니라, 내가 끝까지 책임질 수 있는 답은 무엇인가.


이 변화는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 훨씬 깊다. 왜냐하면 판단은 언제나 책임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시선에서 보면, 변리사의 일은 여전히 비슷해 보일지도 모른다. 특허 명세서를 쓰고, 의견서를 제출하고, 권리를 확보하는 일이다.


AI가 도입되었다고 해서 그 외형이 극적으로 바뀐 것은 아니다. 하지만 안쪽에서는, 일의 무게 중심이 분명히 달라졌다.


AI는 기술을 잘 다룬다. 문서로 정리된 기술, 이미 주어진 조건과 데이터 안에서는 충분히 설득력 있는 결과를 만들어낸다.


하지만 AI가 다루는 것은 ‘주어진 상황’이지, 그 상황을 감당해야 하는 사람의 위치는 아니다. 이 기술이 어떤 사업 단계에 놓여 있는지, 이 선택이 실패했을 때 누가 가장 큰 타격을 받는지는 단순한 정보의 문제가 아니다.


어디까지를 감수하고 어디에서 멈춰야 하는지는 계산이 아니라 판단의 문제다.


요즘 나는 문장을 고치기보다 질문을 먼저 던진다. 이 표현을 썼을 때 의뢰인은 무엇을 기대할까, 심사관은 이 문장을 어떤 맥락에서 받아들일까를 먼저 생각한다.


그리고 만약 결과가 기대와 다를 때, 나는 어떤 설명을 할 수 있을지 스스로에게 묻는다.


AI는 묻지 않는다. 대신 빠르게 제안하고, 의심하기보다 완성하려 한다.


그렇기 때문에 AI 시대의 변리사는 ‘더 잘 쓰는 사람’이 아니라 ‘더 많이 판단하는 사람’에 가까워지고 있다.


이 지점에서 많은 변리사들이 혼란을 느낀다.

“이제 우리가 하는 일의 가치는 어디에 있는가”

“AI가 다 할 수 있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 앞에서 멈춰 선다.


이 질문은 충분히 정당하다. 하지만 그 질문에 대한 답은 “AI보다 더 잘하자”가 아니다.


아니, 오히려 정반대다. AI가 잘할수록 우리는 더 잘하지 않아도 되는 영역을 의도적으로 내려놓아야 한다.


그리고 그 대신, AI가 대신할 수 없는 판단의 자리에 더 깊이 들어가야 한다.


그 판단이란 법 조항을 외우는 능력이 아니다. 그것은 상황을 해석하고, 불확실성을 견디는 감각이다.


정답을 찾는 기술이 아니라, 어떤 선택이 덜 위험한지, 어떤 설명이 관계를 지킬 수 있는지를 가늠하는 태도다.


일반인에게 변리사는 여전히 ‘전문가’로 보일 것이다. 하지만 그 전문성의 내용은 이미 변하고 있다.


이제 변리사는 모든 걸 아는 사람이 아니라, ‘이 선택이 왜 필요한가’를 끝까지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AI는 결과를 제시한다. 변리사는 그 결과가 왜 지금은 맞고, 왜 이 사건에는 적합하지 않은지를 말해야 한다.


설명이 가능할 때, 전문가는 다시 살아난다. 말의 무게가 다시 사람에게 돌아온다.


나 역시 처음에는 이 변화가 반갑지 않았다. 손에서 일이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었고, 내 역할이 줄어드는 것 같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나는 오히려 더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더 많은 판단을 요구받았고, 그 판단에 대해 더 자주 설명해야 했다.


AI는 결정을 대신하지 않는다. 결정의 결과를 감당하지도 않는다. 그 무게는 여전히 사람에게 남아 있다.


이 점에서 AI 시대의 변리사는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위치가 이동할 뿐이다.


기술의 앞자리가 아니라, 판단의 한가운데로.


나는 여전히 명세서를 쓴다. 하지만 그 문장을 쓰기 전에, 이 문장이 놓일 자리를 먼저 생각한다.


이 문장이 만들어낼 파장을 먼저 떠올린다. 그 과정에서 나는 점점 더 ‘사람을 상대하는 사람’이 되어간다.


기술 그 자체보다, 기술을 둘러싼 판단과 책임을 다루는 사람이 되어간다.


AI 시대에 변리사의 위치를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우리는 더 이상 정보를 독점하는 전문가가 아니다.


대신, 판단을 함께 짊어지는 동반자에 가까워지고 있다.


이 변화는 낯설다. 역할을 내려놓고, 기준을 다시 세워야 한다.


하지만 그 끝에는 늘 같은 사실이 남는다. 누군가는 판단해야 하고, 누군가는 그 판단을 설명해야 한다.


그리고 그 자리에, 나는 아직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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