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느린 확신을 고집하는가

4화

by 이민주

요즘은 답이 생각할 틈도 없이 너무 빨리 나온다. 질문을 던지기도 전에 이미 여러 개의 답이 화면 위에 떠 있고, 어떤 선택이 더 좋아 보이는지까지 정리되어 있다. 마치 고민이라는 과정이 필요 없다는 듯, 결론만 빠르게 도착하는 느낌이다. 우리는 점점 생각하기 전에 선택하는 데 익숙해지고 있다.


처음에는 이 속도가 솔직히 말해 편했다. 고민할 시간이 줄었고, 결정이 쉬워진 것처럼 느껴졌다. 망설일 필요 없이 가장 그럴듯한 답을 고르면 된다는 안도감도 있었다. 빠르게 움직이는 사람이 유능하다는 기준에, 나 역시 크게 의문을 품지 않았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나는 그 빠른 답들 앞에서 예전보다 자주 멈추게 되었다. 답은 분명 정리되어 있었지만, 마음이 쉽게 따라가지 않았다. 선택을 누르기 직전, 설명하기 어려운 불편함이 남았다. 그때부터 속도와 확신 사이에 미묘한 간극이 있다는 걸 느끼기 시작했다.


이 답이 정말 맞는 걸까. 아니면 단지 가장 먼저 도착했을 뿐인 답일까. 빠르다는 이유만으로 선택해도 괜찮은 걸까. 이 질문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우리는 오랫동안 빠른 사람이 유능하다고 배워왔다. 즉각 반응하고, 바로 결정하고, 지체하지 않는 태도가 일을 잘하는 사람의 기준처럼 여겨져 왔다. AI는 이 기준을 거의 완벽하게 충족시킨다. 빠르고, 정확하고, 흔들리지 않기 때문에 그 답은 더욱 정답처럼 보인다.


하지만 문제는 여기에 있다. 정답처럼 보이는 답이 항상 책임질 수 있는 답은 아니라는 점이다. 일을 하다 보면 당장은 맞아 보이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위험해지는 선택들이 있다. 그 위험은 숫자로 바로 드러나지 않고, 관계와 신뢰, 감정의 균열 같은 형태로 천천히 나타난다.


그리고 그런 결과는 나중에야 비로소 돌아온다. “그때 왜 그렇게 결정했을까”라는 질문의 형태로. 이미 되돌리기 어려운 시점에서야, 선택의 무게가 실감 난다. 속도가 빨랐던 만큼, 감당해야 할 시간은 길어진다.


그래서 나는 점점 빠른 답보다 느린 확신을 택하게 되었다. 바로 결정하지 않고, 한 번 더 생각하고, 이 선택이 만들어낼 다음 장면을 상상해 보는 쪽을 선택했다. 지금은 맞아 보여도, 이후의 상황까지 함께 떠올려보는 시간을 일부러 만든다. 그 시간이 나를 불안하게 만들 때도 있지만, 동시에 나를 지켜준다는 느낌도 준다.


이 태도는 겉으로 보기엔 비효율적이다. 속도는 늦어지고, 결정은 미뤄진다. 때로는 답답해 보이고, 우물쭈물하는 사람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느림 속에는 빠른 답에는 없는 감각이 하나 있다.


‘이 결과를 감당할 수 있다’는 감각이다. 이 선택이 틀렸을 때, 나는 이 결과를 받아들일 수 있는가. 설명할 수 있는가. 그리고 그 이후의 관계를 다시 이어갈 수 있는가.


이 질문을 통과한 답만이 비로소 ‘내 답’이 된다. AI는 이 질문을 하지 않는다. 정답을 제시할 뿐, 그 정답 이후의 세계까지 책임지지는 않는다.


그래서 나는 요즘 일이 쉬워졌다는 말에 쉽게 고개를 끄덕이지 못한다. 단순한 작업은 줄었지만, 판단의 무게는 오히려 더 무거워졌다. 선택지가 많아질수록, 선택의 책임도 함께 늘어났다. 그 책임은 아직도 사람의 몫으로 남아 있다.


이 변화는 전문직에게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 회사에서, 가정에서, 인간관계 속에서 우리는 이미 수많은 빠른 답에 둘러싸여 있다.

“이게 더 효율적입니다.”

“보통은 이렇게 합니다.”

“대부분 이 선택을 합니다.

”라는 말들은 우리를 빠르게 설득한다.


하지만 그 ‘보통’이 항상 나에게도 맞는 건 아니다. 그 사실을 인정하는 순간, 우리는 다시 느려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느림은 실패가 아니라 선택이 된다.


느린 확신은 망설임이 아니다. 그것은 책임을 받아들이기 위한 준비다. 나는 이제 답을 빨리 내놓는 사람보다, 답을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졌다. 왜 이 선택을 했는지, 왜 다른 가능성을 버렸는지, 그리고 이 결과를 어떻게 감당할 것인지까지 말할 수 있는 사람.


AI 시대에 사람의 가치는 어쩌면 여기에서 다시 시작되는지도 모른다. 속도 경쟁에서 이기는 데서가 아니라, 속도를 내려놓을 수 있는 용기에서. 나는 여전히 느리다. 그리고 그 느림이 지금의 나를 지탱하고 있다.


빠른 답이 넘쳐나는 시대에, 느린 확신을 고집한다는 건 어쩌면 가장 인간적인 선택일지도 모른다. 나는 지금, 너무 빨리 답을 고르고 있지는 않은가. 그 답의 결과를, 끝까지 책임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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