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사랑 로판, 포르노가 되다

소설 장르 트렌드

by 이표


'인소(인터넷 소설)'를 처음 접한 건 내 또래 친구들이 그러했듯이 귀여니 소설이 유행할 때였다. 모든 단어를 분해해서 재조립한 것 같은 말투와 인물들의 특성을 나타내는 이모티콘. 모든 것이 친구들과 이야기하는 듯이 생생했다.

다음은 연재 사이트였다. 어쩌다 알게 됐는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로맨스 소설만 중점으로 운영되었다. 처음으로 '로판(로맨스 판타지)' 장르를 알게 됐고, 어른들의 세상으로만 보였던 일반 로맨스보다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로판은 작가가 만들어낸 미지의 세계를 탐험할 수 있었다. 평소 우리가 겪을 일 없는 배경을 다루므로 감정선이 매우 깊었다. 쉽게 먹는 한 끼의 식사가 판타지 안에선 생사가 오가는 위기가 되었으니까. 여성이 주인공인 장르이고, 로판 안에서 여주는 온갖 어려움을 극복하며 성장한다. 매료되는 게 당연했다.



장르문학이라는 이름으로 하급 취급받던 인소는 '웹소(웹소설)'로 넘어오며 하나의 큰 시장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웹소 소비자의 나이가 어려지고, 로판의 위상은 완전히 달라졌다. 일반 로맨스만큼 로판의 비중이 높아졌고, 플랫폼이 다양해지면서 로판을 주력으로 하는 곳도 생겨났다. 독자로서 행복했다. 가상시대물, 서양로판, 동양로판 등 배경을 중심으로 세분되어 취향대로 즐길 수 있게 되었다.


물론 반작용도 생겼다. 인소를 즐기던 어린 연령층이 웹소로 넘어오며 성인이 되자, 웹소 시장에도 본격적으로 성인물이 등장했다. 소설 전개에 감정의 깊이를 더해주는 장치로 사용되던 일부 ‘애정씬’이 아니라, 맥락 없이 섹스로 이어지는 순수 성인물 말이다. 여성들이 성적 콘텐츠를 건강하게 소비할 수 있는 창구가 생겨났다는 측면에서 좋았다. 성인 여성이 합법적 창구로 성인 콘텐츠를 소비하는 건 당연하니까 말이다. 문제는 ‘포르노’ 키워드가 붙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중에서도 로판의 포르노화가 심각해졌다. ‘판타지’라는 장르의 특수성 때문에 그 정도가 지나치게 과해졌다. 과거 로판에서도 성을 폭력적으로 다루는 경우가 있었지만, 적어도 여주가 그것을 문제로 인식했다. 그렇기에 비슷한 경험을 했던 여성들이 소설을 읽고 여주가 극복하고 성장하는 과정에서 위로받을 수 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는 ‘몸정’이라는 이름으로 성폭행이 이뤄져도 맥락 없이 ‘맘정’으로 이어진다. 온갖 폭력적인 장면을 나열해 놓고, 갑자기 두 사람이 실은 사랑한 관계라고 마무리한다. ‘로맨스’ 판타지 카테고리에 넣어야 하기 때문이다. 육체적 폭력이 무조건 사랑으로 이어진다고 착각하게 만드는, 지극히 가벼운 키워드가 되어 버렸다. ‘근친’ 소재는 어떤가. ‘유사근친’이라는 얄팍한 가림막으로 세상에 당당히 나온다. 가족이라는 안전한 관계를 성적 착취의 대상으로 변질시킨다.



내가 로판을 사랑했던 이유는 여성 작가가 쓴 여주의 주체성에 있었다. 여성의 시각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게 당연했던 로판이, 어느새 남성의 폭력적 시선으로 왜곡된 채로 그것을 ‘로맨스’로 소비하고 있다는 사실에 견딜 수 없는 절망감이 든다.


우려의 목소리를 내는 소비자가 나 하나뿐일 리는 없다. 그렇지만 아무리 애정을 가지고 자정을 원하는 댓글을 달아도 '진지충'이라는 멸칭만 얻고 '하차'하게 된다.




내가 사랑했던 로판은 포르노가 되어버렸다. 하지만 여전히 로판의 가치를 추구하는 작품들이 있다. 그래서 믿는다. 로판이 다시 깊이를 되찾을 날이 오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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